[1차 연성] 白夜
[1차 연성] 白夜
# 1.
첫 기억은 눈물도 흘리지 않던 부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모습조차도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그 손에 이끌려 돈이 많다던 그 커다란 집에 도착한 것은 잊혀 지질 않는다.
‘사랑한단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작은 나를 꼭 껴안고 나서는 도망치듯 커다란 집에 나를 두고 떠났다. 그 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이름이 없던 것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이름도 참 내키는 대로 불러댔으니 그 땐 전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남자 아이만 이름이 있고 여자 아이는 이름이 없다고, 오라비는 멋진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커다란 집에 오게 된 것도 다 오라비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라비 장가갈 날은 다가오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는 나를 커다란 집에 팔아 넘겼다. 부잣집이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주인집 양반이 나이도 찼는데 혼인을 안 한다는 둥의 소문이 안 좋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안 좋은들 돈이 필요하니 딸까지 팔아버리는 인간들의 양심이란,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름이 무엇이느냐.”
“이름이 없사옵니다.”
“이름이 없으면 무엇이라 불렸느냐.”
“봄에는 꽃분이요, 여름에는 점순이라 불렸고, 가을에는 낙랑이라, 겨울에는 설령이라 불렸사옵니다.”
이름이 없어 보이는 대로 불렸다는 것을 참 시적으로 말하고 나니, 8살이 말하기에는 참 덤덤히도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8살답지 않게 칭얼거리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으며 그저 차분하고 어떻게 보면 어른스러운. 약간의 흑역사도 곁들여지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붙여줘도 괜찮겠느냐.”
나를 보며 묻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 발에 맞추어 서 있자 무릎을 굽혀 내게 눈을 맞춘다. 동의를 얻는 듯 한 당신의 묘한 눈빛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리에 손을 대고는 당신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 ‘백야(白夜)’이니라.”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자 나의 검었던 머리는 흰색으로 물들었다. 희고도 하얀 머리와 빛을 못 봐 그을리지 못한 피부는 환상의 조합이라도 되는 마냥 나를 투명하게도 빛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하얀 머리와 ‘하얀 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2.
“나으리, 소녀 혼인시켜주시어요.”
돈이 권력인 것은 그 시대에도 당연했다. 돈으로 벼슬을 사는 시대도 있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돈을 아끼는가. 내게 나으리라고 부르라 하던 당신도 그 돈으로 나를 공부시켰다. 서당을 다니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반대로 스승을 집으로 불렀다. 공부 좀 했다는 스승도 처음엔 나를 성별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거부하려 들었지만 돈은 많이 주니 일단 가르쳐보았는데 사내보다 영특하다며 나중에는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었다더라. 그 말에 우리 나으리 한사코 거절했다지만.
“혼인...이라 하였느냐.”
공부하던 어느 날, 스승이 내게 물었다. 시집은 언제 가겠냐고.
시집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리 자각시켜주니 문득 내 나이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예, 이팔청춘마저도 넘긴 소녀 나이를 보시어요.”
나으리에게 온 것이 8살 때. 그리고 나으리 밑에서 산지 어언 10년.
그 당시 내 나이 18살.
그 때 나으리의 당황하고도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내는 있고 말하는 것이냐.”
“그... 그것은 없으나, 그래도 혼기 찬 여인이 혼자 사는 것도 문제라 들었사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혼인시켜 달랬으니 우리 나으리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내도 없으며 어찌 혼인을 시켜 달라 한 것인지, 혼인을 할 돈은 있는지, 혼인을 한 뒤의 계획도 있는지 등등. 물론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혼이 전부 털렸다.
“그래도... 소녀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시지 않으시어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거야 나으리도 혼인을 하실 게고, 저도 혼인을 시켜 주실 게고... 어찌 되었든 소녀를 죽을 때까진 데리고 있으실 생각은 없으실 거 아니어요.”
아무리 돈을 주고 사왔다 한들 노예보단 양딸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에 나으리도 딸의 혼인 정도야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 알았다. 물론 우리 나으리가 오랜 세월동안 혼인 안 했다고 말은 많았으나, 나으리 정도의 미모이면 그 아무리 40살이라 한들 누구든 혼인 하겠다 줄을 설 정도였다. 게다가 설마 나와 혼인하고자 나를 사왔을까. 나으리의 행동을 10년간 봐왔기에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나으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예?”
“무엇보다 넌 인간도 아니지 않느냐.”
나으리는 나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셨다. 그리고 나으리는 내게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생각을 그만두었다. 저것은 그저 나으리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단순한 사고가 참 우스웠다.
와하하,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내가 너에게 이름을 준 날부터 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자, 보아라.”
나으리는 내게 보아라, 명하셨고 나는 그저 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으리 뒤쪽으로 무언가 하얗고 커다란 게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꼬리를 닮았사온데... 그것이 무엇이어요? 나으리 뒤에 짐승이라도 있으시어요?”
“이것은 내 꼬리이다.”
“...예?”
“나는 본디 인간이 아니라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九尾狐)란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나의 뒤쪽을 만져보았다. 무언가 만져지자 그것을 잡아 크기를 가늠하였는데, 그것은 작고 따뜻하고 복슬복슬하며 자신만의 자아가 있는 듯 내 손에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것에 대해 이질감이 들어 그것을 확 놓고 말았다. 누군가 내 뒤에 작은 강아지가 꼭 붙어 안 떨어지는 것이라 말해주었음 할 정도로,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나으리...”
“10년 간 그 정도의 꼬리가 자란 것이니라.”
“하지만 소녀는... 전혀 몰랐는데...”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네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꼬리도 안 보일 것이니라.”
인생 18년 째, 처음으로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 뒤로부터 모든 행동에 심혈을 기울여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거 잊어도 애초에 여우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기 무방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안 후 부터 나의 혼인 이야기는 쏘옥 들어갔다.
“어찌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닌 영물이래도 달아나지 않느냐.”
“달아나서 소녀에게 득 되는 것은 무엇이 있사옵니까.”
“어딘가로 달아나 구미호가 된 것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럼 무엇 하옵니까. 10년이 지나도 나으리께선 변한 것이 하나 없는데 소녀라고 오죽 하겠나이까. 그리고 이미 팔려 온 몸, 나으리가 거두어주셔서 감사하온데 어딜 가서 또 간사히 몸을 챙긴단 말이옵니까.”
구미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나으리는 이제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공부를 한 덕인지 나으리 곁에 있는 것이 훨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내가 달아나서 무엇하리오. 나는 그렇게 나으리 곁에서 구미호의 삶으로 더 살게 되었다.
# 3.
200년이 지났다.
구미호로 산 지 어언 200년. 참, 시간 참...
“빠른 거여요?”
“무엇이 말이냐.”
“200년이란 시간 말이어요.”
“빠른 것이라 느끼느냐.”
“어림조차 못 하겠사와요. 나으리는 어떠신지요?”
“내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느니라.”
나으리의 말에 나는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꼬리 하나에 100년을 산다는데 이 900년 하고도 나와 200년을 더 사신 나으리온데. 1100년 이란 세월은 정말 어림할 수가 없었다.
200년 간 외모가 바뀌지 않았다. 겨우 100년에 한 살 먹는 속도로 성장이 늦어지는 기분이었다. 고로 나는 인간 나이로 20살 쯤. 다들 혼인하고 아이 낳을 때 나는 200년을 살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아무렇지 않는 것이.
한 곳에 약 20년을 머물다가 거처를 옮긴다. 빠르면 10년, 좀 괜찮으면 25년. 그러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노년층이 있다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웃어넘긴다. 그것이 다였다. 처량하다. 본인을 본인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남을 부르듯 웃어넘기고.
“나으리는, 인간이 되고 싶사옵니까?”
“...어떤 여우는 그리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여우 말고, 나으리 말이어요.”
“...나도 되고 싶었다.”
“왜요?”
“긴 삶을 사는 건 너무나 혹독한 일인 것을 알았으니.”
100년도 안 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라고 하니 당연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당신은 버티기 힘들었겠지. 꼬리하나가 자랄 때 쯔음 이미 다른 이들은 사라지고 없으니까. 나를 거두어주신 당신은 참 정에 약한 여우였다. 더 인간다웠다. 인간이 되고 싶던 이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시온지.”
“지금은, 그러려니 살고 있다. 너도 있고.”
“...그럼 소녀를 구미호로 만드신 이유는 소녀를 나으리 곁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사옵니까?”
“...비슷한 명분이라 일러두겠느니라.”
200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었는데도 난 아직 나으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 많은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왜 나으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까. 차암, 이리 아버님 같은 분을 나는 그리 오래도 따랐다. 마치 숨기시는 게 많은 아버님 같은, 그런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숨기려고만 한다.
“소녀도 인간이 될 수 있사옵니까?”
“그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허지만 인간을 여우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로 여우도 인간으로...”
“나도 그리 인간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
구미호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구미호가 되는 일은 내가 처음이지만,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거듭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이지?
본래 인간이 구미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구미호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 4.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자 하니 나으리가 안계셨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일이 요즘 잦아지셔서 오늘도 그러시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변수가 좀 있는 날이었다.
“연, 자네 있는가?”
누군가를 찾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왔다. 그 손님이 누군지 모르고 누구를 찾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누구시어요?”
“자네는 누구인가?”
“...소녀는 백야라 하온데...”
“나는 린이라 하네.”
“그래서 누구시어요...?”
“그건 내 나중에 알려주겠네.”
그는 참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갓을 쓰고 훤칠하게 생긴 사내는 나보다 키가 컸기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연, 있는가?”
“연...? 혹 나으리 말하시어요?”
“나으리, 라 부르는가?”
“예. 그리 부르옵니다.”
그러고 보니 나으리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으리의 이름은 ‘연’인가. 처음 듣는 나으리의 이름이었다. 헌데 나으리는.
“나으리는 지금 집을 비우신 상태이옵니다.”
“집에 없는가?”
“예.”
“흐음.”
그는 자신의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아, 예.”
손님은 나으리의 친구일까. 나는 그가 들어오자 부엌으로 가서 마실 것을 내어왔다.
“드시어요.”
“고맙네, 그래.”
“나으리는 어인일로 찾으시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 내 오랜 친구가 보고 싶어서.”
“...어, 그런데 나으리는...”
“나는 연의 오랜 친구인 ‘기린’이라네. 자네는 ‘구미호’인가?”
“...예. 구미호이옵니다.”
나으리의 친구라는 그는 해태같이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기린’이었다.
“연은 언제 오는가?”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근래에 일찍 나가시어 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잦으시긴 하온데...”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 흠...”
무언가를 아는 듯이 다시 턱을 쓰다듬는 그 분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찰나 내게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나와 친구하겠는가?”
“예?”
“나는 그리 연과 친구를 하게 되었다네. 나이는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을게야.”
“하지만 나으리 친구분이시면...”
“괜찮네. 우리는 어차피 불멸의 존재이니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나와 친구하세. 백야였는가?”
“...예. ‘백야’가 소녀의 이름이옵니다.”
“말 놓으세. 편히 부르게나.”
“...그리 하도록 노력해 볼 테니 재촉 좀 하지 마시게나...”
“허허, 알겠네 알겠어.”
나으리가 집을 일찍 나가신 날, 나는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었다. 하지만 나으리처럼 계속 같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만날까 말까할 정도였다.
어쩌다 만나면 참 기뻤다. 왜냐면 그 날 나으리가 나가시고 전혀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쭉 혼자였기에 어쩌다 그를 만날 때마다 참 기뻤고 혹여 나으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도 나으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시겠지, 그리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산지 몇 년이 지났던가.
# 5.
“몇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이 흘렀지.”
때는 한 여름. 나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 내 앞에 있는 빈자리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지내었는가?”
“보시다시피? 너는 어때.”
“나도 보시다시피 지내내.”
내가 어디를 가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내었다. 그건 우리 나으리 때부터 그랬다던데. 떠돌이 생을 사는 그라지만, 그도 어쩌면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마실래?”
“시원한 커피로 부탁하네.”
“내가 사는 거야?”
“그러려고 내게 물은 거 아닌가?”
“맞아, 사줄게.”
나는 피싯-, 웃고는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주었다. 같이 지낼 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게 몸에 배었다고 해야 할까. 그 옛날에도 돈이 많았지만 쓰는 법을 잘 몰라 가만히 두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쓰고 있다.
“요즘은 어찌 지내는가?”
“요즘은, 친구들이 생겼어.”
“나 같은 친구들이 말인가?”
“응. 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나만큼 오래 살 친구들.”
“오호, 어찌 만났나?”
“살 곳을 정하다가. 하숙집이라 길래 처음엔 꺼려졌었는데 그 집주인이 내 정체를 그냥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만나게 됐지.”
“그래서 재밌는가?”
“당연하지.”
그를 위해 시켰던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는지 진동 벨이 울렸다. 그에게 벨을 쥐어주며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으리는, 아직도 못 만났어?”
“연? 으응, 아직도 못 만났네.”
“...어디서 잘 살고 계실까?”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 믿게나. 연이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
“하지만 나한테 말없이 가실 분이 아닌데...”
약 200년 같이 살았지만 그리 믿음이 없으신 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세월에 무뎌져 그의 말대로 어디서 잘 계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너도 하숙집에서 살 생각 없어? 방은 집주인이 만들어 줄 텐데.”
“미안하지만 난 떠돌아다니는 게 더 즐겁네. 어디 발 묶여 있는 건 질색이라네.”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 권유할 생각은 없지만.”
“그거면 됐지 또 무얼 바람세.”
“그냥. 시간 날 때 나 만나러 와주는 거.”
“그거라면 언제든 그래줌세.”
“또 나으리 이야기도 해주고.”
“거거, 연의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나.”
“700년은 더 들을 수 있어.”
“벌써 그만큼 세월이 지났나?”
“응. 벌써 꼬리 아홉 개인걸.”
“차암, 처음에 만났을 땐 겨우 두 개밖에 안되지 않았나.”
“세월 가는 대로 산 거 뿐이지, 뭐.”
말을 편하게 주고받는 이 관계가 참 편하디 편했다. 오랜 친구라 그렇겠지. 이제 내게도 오래 될 친구들이 생겼으니 외로울 일은 없겠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은 지 오래 되어서 그 감각이 무뎌졌지만, 다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난 가보겠네. 커피 잘 마셨네.”
“어, 잘 가고. 백 년 안에는 보자.”
“그럼세. 잘 있게나.”
그가 가고 나자 나도 내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나를 반겨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아,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 사가야겠다.
“이쁜이들, 보고 싶다!”
# 0.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나와 같이 지내려는 누군가가 없었다. 같은 구미호래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따르려하지 않았고, 인간과 같이 사려니 내가 너무 오래 산다. 이별을 겪기엔 너무 많은 이별을 겪을 거 같기에. 그런 아픔을 갖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구미호는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할까. 오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또 무엇이고.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이 구미호로 될 수 있을까?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구미호의 기를 인간에게 주면 그 인간은 구미호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구미호가 되고 싶다고 할까. 게다가 아직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게다가 그런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인 마냥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긴 세월을 외로이 지내는 것보다 누군가와 부대끼는 짧은 삶이 편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간이 되거나, 누군가 긴 세월을 함께 할 이를 찾거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스르려는 내가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상의 이치가 낮과 밤으로 나뉜다면, 그 이치를 깨끼 위해 살아가는 나는 모순인가.”
구미호는 오래 살기에 인간과 함께 살면 안 된다. 그들의 이치와 우리의 이치는 다르기에 그들은 우리를 그저 요물로 보고 처단하려 든다. 그래서 우리는 숲속에 숨거나 인간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본 모습을 들키지 않게 살아야 했다. 세상이라는 빛에 우리는 타들어가지 않게 어둠 속에 숨어 살아왔다.
언제까지 어둠에 있어야 하는가. 언제쯤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을까. 구미호가 인간이 되면? 아니면 인간을 구미호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면?
“하얀 밤...”
그 밤을 보고 싶다. 어두워도 어둡지 않고 낮의 빛으로 같이 물든 그런 밤. 해가지지 않아 세상 만물이 보이는 그런 아름다운 밤.
더 이상 우리들도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
“내 언젠간 그 밤을 보리라.”
그 밤을 보고 그 밤을 곁에 두어 내 한생 끝날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두리라. 그리고 이 생명 끝날 때 쯤, 나는.
-
툭-
상가 길을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예전이었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생각과 다르게 휘청거린다. 곧 넘어질 거 같다. 하지만 부딪힌 상대가 내 팔을 부드러이 잡아주었다.
“고맙네...”
“괜찮사옵니까? 소녀가 부딪힌 것이어요. 소녀가 잘못했사옵니다.”
“나는 괜찮네...”
익숙한 목소리. 나는 상대를 알아보았지만 아마 상대는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날 알아보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있다.
“소녀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어도 괜찮사와요?”
“괜찮네. 혼자 갈 수 있네.”
참, 변한 것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하얀 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자신이 하얗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이리도 아름다운 빛을 큰 전모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도 보고 싶었던 하얀 밤조차도 아직도 어둠 속에 있으니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서 가보게나.”
“예. 어르신도 살펴 가시어요.”
상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를 지나쳤다. 나는 나이에 맞겠거니 싶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대로 헤어지면 좋겠건만.
“연어르신!”
누군가 내 옛 이름을 불러 날 세우는 게 아닌가. 날 부른 이는 내가 가르치는 제자 중 한명이었다.
“그건 옛 이름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직접 지은 호로 불러주게.”
“아, 죄송합니다. 흑주(黑晝)어르신. 여쭙고 싶은 게 있어 모습을 보이실 때 급히 불렀습니다.”
“괜찮네. 무엇을 물으러 왔는가.”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얀 밤이 지나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얀 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하얀 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얀 밤 또한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나는 집을 나갔다. 하얀 밤이 자신의 정체에 적응이 될 때 쯤, 내가 점점 인간이 되어갈 때 쯤, 내가 사라져도 나대신 모든 것을 잘 짊어지고 갈 수 있으리라 확신이 설 때 쯤 나는 그리 나갔다.
그리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0년 전 집을 나온 이래 난 내 지혜로 인간들을 가르치며 살아갔다.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그들과 같이 부대끼며. 내가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부터 나는 내 본 이름에 ‘검은 낮’이라 호를 붙였다.
‘흑주 백연’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이 있다면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낮도 있으리라. 대낮에 당당히 거리를 거니는 어둠. 빛을 받아도 그 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 어둠을 그리 칭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