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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정우/선생×학생]

글쟁이문어 2019. 10. 6. 02:33

[진우정우/선생×학생]

 

 

 '좋아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 따위 안하고 있을 텐데. 이 마음을 깨닫기는 참 오래 걸렸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여서 나는 솔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우 왔어?"

 "."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궁금하다고?"

 "."

 "전에도 이 비슷한 문제 가져온 거 같은데?"

 "원래 틀린 문제 또 틀리기 마련이죠."

 "그래도 정우는 잘 풀잖아."

 "아뇨.. 저도 다 잘 풀지는 않아요."

 문과와 이과가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까. 이과를 선택한 나와 문과인 선생님의 접점은 너무 적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께 오는 이유는, 이과학생이라는 편견 없이 대해준 유일한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연히 풀어본 사회탐구 영역에서 모르는 부분이 생겼었다. 해설을 봐도 이해가 안 되서 말로 듣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어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들 '이과학생이 왜 이런 걸 묻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한 선생님들은 이런 거물을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제가 궁금하다는데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혼난 뒤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선생님."

 "? 정우구나. 무슨 일이야?"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요."

 "그래? 무슨 문제인데?"

 "이거..."

 "- 이건...-"

 선생님의 설명에 바로 이해가 됐었다. 역시 설명을 듣는 게 내겐 좋았던 것이다.

 "근데 선생님은 안 말하세요?"

 "?"

 "이과 학생이 왜 물으러 왔냐, 같은 거요."

 "정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건 학생이 궁금한 걸 물으러 왔다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그런 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되는 거고."

 "..."

 내게 수학문제 풀라고 말하지 않아주었던,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오라고 이야기해주었던, 유일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준 선생님.

 그 선생님에게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자각하기란 내겐 의외로 무척 어려운 영역이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당장에 배웠겠지만, 세상엔 내가 배울 수 있는 한계와 내가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질문만 잔뜩 만들어가고 싶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었다.

 "이번 수능에 나왔다는 문제인데요..."

 ", 그렇네. 정우 이제 수능도 쳤고. 곧 졸업하겠네?"

 "...그렇네요."

 대학을 생각안 한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질문을 만들어 갈 수 없단 걸 알고 있었지만. 수능이 끝나고도 나는 이렇게 문제를 들고 왔다.

 "...졸업하면 더 이상 선생님은 못 보겠죠?"

 "왜 못 봐? 스승의 날이나, 정우 공강 날 오면 되지. 그렇지?"

 "그런가요..."

 싫어요. 그런 사제관계는 싫어요. 이제 졸업하면 나도 더 이상 고등학교 제자는 아닐 텐데.

 "...올게요."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과 다른 말이 나왔다는 걸 알고 나자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

왜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 언제든 놀러와 정우야."

 선생님의 미소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지원 넣은 대학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

 천문학과 합격. 수학과 합격. 물리학과 합격. 법학과 합격. 생명공학과 합격. 그리고,

 "여섯 개중에서 한 개만 선택해야 하는데..."

 합격한 모든 걸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은. 이미 내가 나의 한계를 깨닫고 단 하나만 공부하겠다는 결정의 마음이었던 걸까.

 "빠르면... 6년일까."

 재학과정 4년에 군대 2년이니까... . 하긴 선생님도...

 "안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한 번 뵈러 가야겠네."

 보고 싶어.

 "아니... 그냥 인사치례로..."

 보고 싶어.

 "대학 붙었다고 말씀드리러..."

 보고 싶어.

 "왜 내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좋아하니까.

 "...?"

 마음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정신이 번뜩 뜨였다. 말도 안 돼... 그냥 작은 동경심일거야. 그런 선생님은 마땅히 우상이 되실만해. 그래서.

 "그래서 그래..."

 근데 왜 매일 질문을 만들어? 왜 사제 관계는 싫다고 생각한 거야? 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왜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솔직하지 못해?

 "..."

 난 그 의문들에 변명을 하지 못했다. 대답은 하나니까. 그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난 마지막으로 합격된 학과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 지구과학교육과 합격

 

 "선생님."

 "정우야. 졸업 축하해. 선생님 보러 온 거야?"

 ". , 그리고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이번에 대학교 합격 통지서 왔는데..."

 "그래? 어떤 과 합격했어?"

 "천문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법학과, 생명공학 그리고 지구과학교육과 합격했어요."

 "전부?"

 "네 전부."

 "정말 우등생이라니까- 하지만 그 중 한 곳만 갈 수 있잖아.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 저 지구과학교육과 가려고요."

 "정했구나. 정우는 어딜 가든 잘 할 거야 분명."

 "...선생님."

 "?"

 "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근데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언제쯤 말해줄 수 있어?"

 "...아마도 6년 뒤쯤이요."

 "6년 뒤?"

 ". 저도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때 말씀 드릴게요."

 소신 있게 준비한 멘트에 진심이 담겨 선생님께 닿았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지금 듣고 싶은데..."

 "제자라고 달래시는 건가요."

 "? 아니. 정말이야. 지금 듣고 싶어. 정우야 6년은 조금 많이 긴 거 같아. 차라리 지금 말해줘 정우야."

 무얼 말할지는 모르고 분명 말하시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 또한 더 많이 배울 6년을 멋대로 낭비하긴 어렵다. 지구과학 교육과를 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서. 지금 이대로 내 마음을 말하면 선생님에 거절할 거 같아서.

 그런데 거절하는 거라면 6년 뒤에도 똑같을 수 있다. 지금 말해서 나쁠 거 없는 나의 6.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나의 6.

 이런 비겁한 변명을 덧칠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진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