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눈
[오소쵸로/단편/리퀘] 눈
2016. 01. for 푸중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어느 화창한 겨울 날, 한가롭고도 조용한 오후였다. 할 것이 없어 TV라도 볼까하고 거실 중앙에 놓여있는 코타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코타츠 안쪽은 생각 했던 것만큼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져 있어서 기분 좋게 나른해 질 수 있었다.
“이 형님 빠칭코 돌리고 올게~”
오소마츠형이 거실로 내려와 그렇게 한마디 툭 던지고 집을 나섰다. 형뿐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형제들도 일 있어 바쁘다며 집에 없었다. 결국 집 안에 있는 건 나 혼자라고 해야 하나.
“하... 다들 니트주제에 바쁘네.”
오소마츠형은 빠칭코, 카라마츠형은 안쓰러울 산책, 이치마츠는 아마도 뒷골목, 쥬시마츠는 야구, 토도마츠는 아르바이트 아니면 데이트... 나는 손가락으로 바쁜 형제들을 한명 한명 짚어보며 그들이 바쁜 이유를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하아... 이번 달엔 냐쨩 콘서트도 없단 말이지...”
결국 나 혼자 안 바쁜 건가, 한숨을 한번 내쉰 뒤 TV보는 것도 뒤로하고 할 일을 찾아보고자 구직 전단지를 꺼내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한번 훑어보고 구석에 치워두었던 것이었기에 봐도 얻는 건 없었다.
한가로운 오후, 아무의미 없는 두 시간이 그냥저냥 흘러갔다.
“다녀왔습니~다리근육 다리근육-!!!!”
“쥬시마츠왔어?”
“응응응응-!!!! 쵸로마츠형 있었네에~!!!”
쥬시마츠가 오고 나니 제 일을 끝낸 듯 이치마츠와 카라마츠형이 차례로 집에 들어왔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토도마츠도 집에 돌아왔다.
“토도마츠까지 왔으니 오소마츠형만 들어오면 되겠네.”
“엣, 오소마츠형 아직도 집에 안 돌아 온 거야-?”
“어... 빠칭코를 얼마나 돌리는지, 아직도 안 왔어.”
“헤에- 오소마츠형답네-”
동생들은 다 왔는데 정작 장남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시계바늘이 거침없이 숫자 사이를 달리고 있는데도 형의 소식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창밖의 어둠이 깊어지자 형제들도 슬슬 배고프다며 저녁을 먹자고 보챘다.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배고픈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녁쯤은 형이 오면 알아서 차려 먹으라 하면 되니까.
따르르릉-, 밥을 먹고 있던 중에 현관 쪽에서 전화벨이 울려왔다.
“내가 받고 올게~ 우오오오-!!!!”
쥬시마츠는 들고 있던 밥그릇을 내려놓고 현관 쪽으로 투다다다다- 달려가 수화기를 낚아채 날아갔다. 결국 쥬시마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관문을 또 깨 부셨다. 매번 요란한 쥬시마츠의 전화 받는 퍼포먼스를 알고 있던 나는 그 상황을 전부 예측했기에 밥그릇을 내려놓고 쥬시마츠를 따라 천천히 현관 쪽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쥬시마츠입니다- 말씀하세요~!!”
오늘은 또 어떤 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을지 걱정됐지만 쥬시마츠는 한번 수화기를 들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잘 안 내려놓는 성격이니까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치비타~ 응? 오소마츠형이...!!”
“오소마츠형?”
형의 이름이 나오자 눈이 약간 휘둥그레졌다. 빠칭코 돌린다더니 치비타랑 같이 있던 건가. 아님 다 돌리고 그곳으로 간 건가.
“응... 응... 잘 알아먹었습니다.”
“치비타가 뭐래?”
쥬시마츠가 어느 정도 치비타의 이야기를 들은 거 같아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쥬시마츠는 날 보며 해맑게 웃고는 대답했다.
“아~ 오소마츠형이 뭔가~ 치비타네 오뎅가게에서 술 마시고 있다나봐. 근데 주술인지 주문인지를 외우면서 소환준비를 하고 있다는데~?”
“...무슨 소리야. 잠깐 바꿔줘 봐.”
역시 쥬시마츠, 내 둘째 동생은 이번에도 상대방의 말을 멋대로 해석해 버렸다. 주술인지 주문인지를 외우면서 소환준비를 한다는 건 마법사 얘기 일려나, 난 제대로 된 상황을 듣기 위해 바꿔달라고 말한 뒤, 동생의 손에 들려있던 수화기를 뺏어 들어 귀로 가져갔다.
“전화 바꾼 쵸로마츠입니다. 치비타, 우리 집 장남이 너희 가게에서 술 쳐마시고 마법사가 되어 소환준비를 한다는 게 사실이야?”
“흐아-... 마법사가 아니고 쵸로마츠-... 오소마츠녀석, 우리 가게 와서 술 마시고 주정 중이니까 있으니까 아무나 와서 데려가라고...”
“아- 그 소리였구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럼 주술인지 주문인지는 술주정이고, 소환준비는 형을 데리러 가라는 전화였을까. 치비타와의 전화를 끝낸 뒤 수화기를 내려놓고 쥬시마츠와 함께 거실로 돌아왔다.
“누구 전화야-?”
거실로 돌아오니 토도마츠가 수저를 든 채 내게 물었다.
“치비타였어. 형이 지금 가게에 있으니까 데려가라고 하더라고. 밥 먹고 있어, 내가 데려 올 테니까.”
“내가 데려와도 괜찮은데, my brother~”
“아니 아니, 카라마츠형은 안쓰러우니까 쵸로마츠형이 다녀와!”
“그래 알았어. 다녀올게.”
장남을 데려오기 위해 옷을 단단히 입고 집을 나섰다. 분명 밤은 추울 테니 안 껴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밀어 젖혔더니 눈앞에 보이는 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였다.
“뭐야, 눈인가...”
하긴 겨울이었다. 요즘 겨울은 춥기만 하고 가끔 비 내리는 게 다였는데 웬일인지 오랜만에 함박눈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어렸을 때랑 달리 눈이 귀찮기는 하지만, 겨울이란 기분을 만끽하는 것엔 매우 충분했다.
우산을 가져갈까 했지만 전에 쥬시마츠가 야구배트대신 스윙연습으로 우산을 썼던지라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오히려 멀쩡한 것들은 아마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어딘가에 깜박 잊고 놓고 온 것들이겠지. 한숨을 한번 내쉬고 그냥 현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눈보라치는 수준도 아니고 눈송이가 하늘하늘 내리는 정도이고 또 곧 그칠 거 같은 속도로 내리는 중이니 우산 없어도 상관없을 거 같았다.
치비타네 가게를 가는 길에는 지금껏 내린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밟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 옛날에는 이런 눈길을 연인과 함께 손잡고 걷고 싶어 했는데...”
철부지 중고등시절 때에는 그런 상상을 자주했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지금은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뭐, 현실은 시궁창이니까-...”
연인은커녕 술에 찌든 장남을 데리러 가는 눈길이라니, 장남을 향해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걷다보니 어느 세 치비타네 빨간 오뎅가게에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 하늘에서 눈 내리는 것이 멈추고 있었기에 술 취한 장남을 데려가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치비타? 오소마츠형 있어?”
“아, 어서 와라 쵸로마츠. 오소마츠 이 녀석, 빠칭코 돌리고 왔다고 하더라고. 다 따였다나 졌다나 뭐라나 하면서 술을 얼마나 들이키던지...”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 한숨을 내쉬며 엎드려 있는 형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들이마셨길래 뻗은 걸까 생각하며 손을 뻗어 형을 흔들어댔다.
“형, 오소마츠형. 일어나.”
“아...? 아-... 아...! 우리 삼남 아니야아-? 횽아보러 왔어~?”
“그래 삼남 쵸로마츠다. 빨리 일어나 장남새꺄. 폐 끼치지 말고 얼른 집에 가자.”
“그래 짜샤. 밤도 늦었으니까 얼른 집에 가버려.”
“흐아아-?? 버얼써어-? 흐아아-...... 싫어어 더 있고 싶어어어-...”
“일어나, 집에 가자. 치비타 외상 해줘”
“아... 그래 짜샤, 눈길이니까 조심해서 돌아가라.”
“어 고마워.”
형의 팔을 들어 내 목에 두르고 부축해 일으켰다. 가게의 빨간 천막을 거둬내니 아까 잠깐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아앗 추워어-... 어... 눈 내리는 거야-?”
“어. 눈 내리니까 빨리 가자.”
“헤-... 눈 내리는 거 오랜만이네에~ 있지 있지 쵸로마츠으-, 빨리 말고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이 횽님 눈에 대한 로맨스가 있다구우-”
술이 좀 깬 듯한 형이 내 부축에서 벗어나 살짝 달려 나갔다. 술 마셔서 평소보다 더욱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형의 행동에 걱정되었다.
“헤헤-,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에에~ 이 횽아 슬프다구? 궁금하다고 말해줘, 쵸로마츠~”
씨익 웃는 미소를 짓는 형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한 숨을 한번 쉬고 짧게 뭔데, 라고 물었다.
“그게 뭐냐아며언~ 이런 눈 오는 날에 눈을 밟으며 연인과 함께 있고 싶달까~”
“엑......”
나랑 같은 생각이었다. 형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으음, 우리 여섯 형제 전부가 설마 모두 같은 걸 생각하는 건가-... 여섯 형제에게 있어 개성이나 특별난 게 없을 거란 생각에 약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뭐야, 삼남~ 미간 구겨졌다구~? 랄까나- 이런 눈길을 연인 아닌 삼남과 함께 걷게 될 줄 몰랐는거얼~”
“...나도 마찬가지거든.”
장남의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져 버려서 잠바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칫, 나도 형 말고 연인이랑 같이 있고 싶었거든, 이왕에 있을 거면 냐쨩이 연인으로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진짜. 카라마츠한테 그냥 부탁 할걸 내가 괜히 데리러 온다고 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짜증을 죽이며 걷고 있었는데 앞서 걷던 형이 갑자기 내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삼남~ 뭐 안 좋은 일 있어~?”
“...어, 있어. 왜.”
“에~ 설마 횽아가 애인대신 같이 있어서 그래~?”
“하아...?”
“이 횽아, 알고 있다구-? 우리 삼남도 눈 오는 날에 애인이랑 같이 있고 싶은 거~ 하지만 현실은 횽아랑 함께지, 안 그래?”
“......”
내 마음은 또 언제 꿰뚫었는지, 찔릴 것도 없는데 괜스레 마음이 움찔거렸다.
“헤헤-, 우리 삼남은 기분 나쁠지 몰라도~ 이 횽아는 기쁘단 걸 알아줬음 좋겠는데~”
“...뭔 소리야. 형도 없는 애인이랑 같이 있고 싶어 한 거 아니었어?”
“음-, 우리 쵸로마츠생각이 역시 거기까지이지.”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내가 더 뭐라 말하기 전에 형은 갑자기 내 잠바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깜짝 놀란 사이에 손을 꼬물딱 거리다가 내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거까지 모자라 형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천천히 밀고 들어와 손깍지까지 끼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당황해서 형을 바라보았는데 형은 날 보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어, 모르겠는데.”
“으음~ 뭐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있어~ 하- 삼남 손 따셔~!!!”
“하아...?”
형의 말이 귓구멍에 찝찝하게 걸리고 말았다. 거슬리는 게 짜증나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형이 먼저 무언가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저것 좀 봐봐 쵸로마츠-, 빛에 반사되어 내리는 눈 말야-, 꼭 다이아몬드가 내리는 거 같지 않아~?”
“아...?”
형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가로등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장남이 말한 거 치고는 아름답긴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저 다이아몬드 하나 주워서 반지로 만들면 예쁘겠지~?”
“...예쁘긴 금방 녹지.”
“에엑-, 횽아 로맨스 깨진다구우~”
뭐 내 알반 아니잖아?, 픽 웃으며 말하자 형은 더욱 에에엑-, 이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형 표정 웃기네, 피식 피식 웃었더니 형은 삐진 표정으로 뭐가 그리 재밌냐고 물었다.
“그냥-, 랄까, 형.”
“응?”
“연락도 없이 또 늦게 까지 밖에 있을 거야?! 나 밥 먹다가 튀어나왔다고!!!”
“아아, 미안 미안-, 다음에 늦을 거 같을 땐 제대로 늦을 거라고 미리미리 얘기할게~”
“그게 아니잖아 장남새꺄!!!!”
하-, 오늘 밤도 장남 때문에 시끄러울 것만 같았다. 뭐, 이게 일상이니까 시끄럽지 않으면 이상하겠지만, 이런 걸 일상이라고 자연스럽게 물들여 있는 내가 불쌍하군. 하아-...
그래도 눈 내리는 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형이 주머니 안에서 맞잡은 손도 매우 따뜻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따뜻한 손에 어쩌면 겨울이란 낮은 기온의 차디찬 밤이란 걸 몰랐을지도.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어느 화창한 겨울 날, 한가롭고도 조용한 오후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몇 백엔이 짤랑거리며 나왔다. 음, 이 정도라면- 오늘 오후에 뭘 할지 결정해 놓으니 마음이 살짝 들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거실로 내려왔더니 쵸로마츠가 혼자 코타츠 안에 앉아있었다.
“이 형님 빠칭코 돌리고 올게~”
사실 형제들이 모두 밖에 나가 있고 집엔 나랑 삼남뿐이었기에 쵸로마츠랑 같이 코타츠 안에 느긋이 앉아 있고 싶었지만, 우리 사랑스런 삼남이 또 어떤 구직적인 잔소리를 할지 무서워 집에서 나온다는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에이, 까짓 거 돈 벌면 되지!, 돈 좀 따오면 우리 삼남, 이 형님 보는 눈빛을 좀 달리 해주려나-.
“으아아-, 사랑스런 눈빛받기 무리!!!!!!”
결국 빠칭코에 건 돈은 죄다 따이고 말았다. 집에 있으나 빠칭코를 다녀오나 삼남의 잔소리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 제일 먼저 날 반길 것만 같았다. 하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삼남 무섭단 말이지?
내가 선택한 마지막 길은 치비타네 오뎅가게였다. 술 마시고 들어가면 우리 삼남 마음이 좀 약해지지 않으려나- 싶었지만, 그것 또한 무리. 막상 술이 목구멍 너머로 들어가니 기억도 안 날 술주정을 치비타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 빠칭코얘기 또한 계속-. 게다가 술주정으로 모자라 이번 술값도 외상일터인데, 결국 난 그 어떤 좋은 해결책도 못 얻은 채 잔소리의 근원지가 되는 걸까 싶었다.
“짜샤, 작작 좀 쳐마셔라.”
보다 못한 치비타가 술에 찌든 내게 한마디 했지만 난 이미 엎질러진 물, 이판사판으로 더 엎지르자 싶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에에-... 아직 더 마실 수 있다구우우- 치비타아-...”
“어휴, 네 형제들한테 전화 할 테니 누구 오면 곱게 집에 가라. 알았지 짜샤?”
내가 얼마나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신이 몽롱하고 눈앞이 흐릴 정도로 마신 것은 확실했다. 술기운을 버티지 못한 나는 치비타가 전화를 하려는 건지 핸드폰화면을 켜고 귀로 갖다 댄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정신이 잠깐 끊기고 말았다.
“형, 오소마츠형. 일어나"
얼마쯤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엎드려 있던 날 흔들어 댔다. 흔들림에 살짝 정신 차려 보니 눈앞엔 쵸로마츠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뭐, 삼남이 걱정하고 있든 말든 내겐 그것보단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지만.
“아...? 아-... 아...! 우리 삼남 아니야아-? 횽아보러 왔어~?”
“그래 삼남 쵸로마츠다. 빨리 일어나 장남새꺄. 폐 끼치지 말고 얼른 집에 가자.”
“그래 짜샤. 밤도 늦었으니까 얼른 집에 가버려.”
“흐아아-?? 버얼써어-? 흐아아-...... 싫어어 더 있고 싶어어어-...”
“일어나, 집에 가자. 치비타 외상 해줘”
“아... 그래 짜샤, 눈길이니까 조심해서 돌아가라.”
“어 고마워.”
쵸로마츠가 치비타와의 대화를 마치자 내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자신에 목에 둘렀다. 삼남의 부축에 의해 몸이 일으켜지니 두 다리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가까스로 정신없는 몸을 지탱하고 가게에서 천천히 나왔다. 천한 장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가게 안과 가게 밖의 기온은 왜 그리도 차이가 나던지.
“아앗 추워어-... 어... 눈 내리는 거야-?”
겨울밤이라 추운 건 당연했을지 모른다. 찬바람이 머리를 훑고 가자 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분명 오후엔 안 내리던 눈이 까만 밤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어. 눈 내리니까 빨리 가자.”
이런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빨리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쵸로마츠가 사알짝 미워지려 했다. 그래서 난 약간 심굴 궂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헤-... 눈 내리는 거 오랜만이네에~ 있지 있지 쵸로마츠으-, 빨리 말고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이 횽님 눈에 대한 로맨스가 있다구우-”
난 쵸로마츠의 부축에서 벗어나 천천히 내리는 눈 속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우리 삼남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물었다.
“헤헤-,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에에~ 이 횽아 슬프다구? 궁금하다고 말해줘, 쵸로마츠~”
"...하아, 뭔데."
결국 물어봐 줄 걸 왜 그리 내뺐는지 몰라, 우리 삼남-. 난 그의 물음에 즐거운 듯 대답해줬다.
“그게 뭐냐아며언~ 이런 눈 오는 날에 눈을 밟으며 연인과 함께 있고 싶달까~”
“엑......”
솔직히 말해보자면, 우리 삼남이 생각하는 로맨스와 같다는 거 이미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에 ‘눈 오는 날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라고 노래 부르고 다니던 사람이 사랑스런 삼남이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그래서 일부러 말한 건데 쵸로마츠는 아마 알 리가 없겠지~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놀리기 위해서 말한 것만은 아니라구-? 누구나 로망이잖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눈 맞는 거! 이왕이면 첫 눈 맞는 거! 하지만 이미 이 장남은 그 로망 이뤘다구-?
뭘 생각하고 있는 지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삼남의 미간이 미세히 구겨졌다.
“뭐야 뭐야, 삼남~ 미간 구겨졌다구~? 랄까나- 이런 눈길을 연인 아닌 삼남과 함께 걷게 될 줄 몰랐는거얼~”
‘삼남’이 아직 ‘연인’이 안 됐으니 아직 연인이 아닌 거지, 안 그래-?
“...나도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내 말에 1%도 삼남의 마음에 안 닿을 거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씨익 웃고는 표정이 구겨져 있는 삼남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삼남~ 뭐 안 좋은 일 있어~?”
“...어, 있어. 왜.”
분명 날 데리러 온 것에 후회 중 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분이 나빠졌다는 검은 오오라를 뿜어내며 잠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 설마 횽아가 애인대신 같이 있어서 그래~?”
“하아...?”
“이 횽아, 알고 있다구-? 우리 삼남도 눈 오는 날에 애인이랑 같이 있고 싶은 거~ 하지만 현실은 횽아랑 함께지, 안 그래?”
“......”
“헤헤-, 우리 삼남은 기분 나쁠지 몰라도~ 이 횽아는 기쁘단 걸 알아줬음 좋겠는데~”
이렇게 멋진 날이 언제 또 오겠나 싶었다. 천천히 내리는 하얀 눈-,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밤-, 술의 기운에 흠뻑 젖은 나-, 그리고 이런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하하, 정말 좋은데 말이지!
“...뭔 소리야. 형도 없는 애인이랑 같이 있고 싶어 한 거 아니었어?”
그러나 우리 둔한 삼남은 전혀 눈치 못 챈다고-!! 항상 생각 많은 척하면서 가장 생각 짧다고-!! 뭐, 그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만 서도 말이다.
“음-, 우리 쵸로마츠생각이 역시 거기까지이지,”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답답한 삼남의 말에 난 그의 잠바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디보자, 우리 삼남이 어떤 식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나-, 손을 꼬물꼬물 움직이고 삼남의 손 모양을 파악하고 잡았다. 따뜻한 삼남의 손은 만족이지만 손잡은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해서 손가락까지 천천히 끼어 넣었다. 역시 이런 스킨쉽은 아직 면역 없나보다 우리 삼남,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너무 가득하잖아! 뭐, 표정은 어떻든 잡은 손을 떨쳐내지 않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며 씨익 웃어보고는 다시 물어봤다.
“무슨 소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러면 좀 알겠나 싶어서 내심 기대했는데, 역시나 우리 삼남-,
“...어, 모르겠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저 담담한 대답! 물론 내가 기대한 거랑 다른 기대지만 여러모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구나!
“으음~ 뭐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있어~ 하- 삼남 손 따셔~!!!”
“하아...?”
물론 쵸로마츠가 반박할 것을 난 알고 있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말은 분명 태클걸기 일쑤일 테니. 삼남이 한소리 하기 전에 정신을 딴 곳으로 팔기위해 손을 뻗고 먼저 말했다.
“봐봐 쵸로마츠-,”
아무생각 없이 팔 뻗어 가리킨 곳은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내리는 눈 말야-,”
그 눈은 마치,
“꼭 다이아몬드가 내리는 거 같지 않아~?”
그래, 꼭 맞는 표현이야. 빛나는 보석,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아...?”
“저 다이아몬드 하나 주워서 반지로 만들면 예쁘겠지~?”
다이아몬드반지, 정말 아름다울 거 같았다. 그 반지가 쵸로마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예쁘게 반짝여 준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예쁘긴 금방 녹지.”
차가운 한마디에 상상의 흥이 깨지고 말았다. 와장창 쨍그랑-!
“에엑-, 횽아 로맨스 깨진다구우~”
“뭐, 내 알반 아니잖아?”
에에엑-, 그 말이 더 상처라고 삼남-, 살짝 삐져서 뾰로퉁 해 있으니 뭐가 웃긴지 자꾸만 피식피식 거리며 웃는 우리 삼남.
“뭐가 그리 재밌는데에-.”
내 물음에 쵸로마츠는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뭐, 그냥이라고 대답할지언정 우리 삼남이 기분 좋으면 나야 상관없지만!
“랄까, 형.”
“응?”
“연락도 없이 또 늦게 까지 밖에 있을 거야??!!!! 나 밥 먹다가 튀어나왔다고!!!”
“아아, 미안미안-, 다음에 늦을 거 같을 땐 제대로 늦을 거라고 미리미리 얘기할게~”
“그게 아니잖아 장남새꺄!!!!”
하하, 오늘 밤도 우리 삼남은 우렁차구나! 바뀌지 않는 일상적인 반복, 아주 좋아!
오늘 밤은 눈까지 내리는, 분명 추운 밤이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또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추워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따뜻했다. 그렇게 따뜻했기에 오늘이란 밤이 정말 최고인 것만은, 그리고 꿈이 아니란 것만은 매우 확실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