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정우/대학생] 감정

 

 

 

 "그거 들었어?"

 "어떤 거?"

 "학교 앞에 카페 있잖아. 거기 새 알바가 왔다는 거!"

 "그래?"

 "가볼까? 그 알바생 무지 잘생겼데!"

 소란스럽다. 강의 시간이 아니면 소란스러움은 진정되지 않은 거 같다. 특히 교양시간은 사람이 더 모여서 더욱... 머리가 아파지면 조용한 곳에 가면 된다. 다음 강의 전까지 시간이 남으니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려고 할 때 쯤 전화가 왔다.

 "연정우!"

 "...뭐야 임청아 왜."

 "톡으로 선물 보냈으니까 즐기고 와!"

 "선물? 뭔 선물."

 "무려 너희 학교 앞에 있는 카페 새 알바생이 잘 생겼다는 제보라고! 그 카페 기프티콘 보냈으니까 알바생 얼굴 좀 보고 와줘~"

 알바생? 뭔 알바생을.. , 그러고 보니 아까 있었던 소란스러움 중에 그런 말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생각을 되짚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벌써 SNS에 다 떴단 말야. 내가 가기엔 조금 머니까 부탁할게! 그럼 나 다음 강의 들어간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전화종료 화면을 바꾸고 선물 줬다는 사촌의 말을 확인해보았다.

 "핫초코랑 초코케이크 기프티콘."

 사촌의 취향이 꾹꾹 담긴 메뉴였지만 만인이 거부안 할 디저트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를 가더라도 소란스러움이 사그라지진 않을 텐데. 그럼 지금은 도서관을 가고 집에 갈 때 쯤 한 번 들리는 건 괜찮겠지. 이왕 선물 받은 것이니 거부할 이유는 없고, 잠깐 그 카페에 들려서 빠르게 포장해서 가도 괜찮을 거 같고...

 

 "월요일도 아닌데 도서관 휴관이라니..."

 가벼웠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생각하다가 기프티콘이 생각났다. 카페... 백색소음으로 오히려 공부가 잘 된다고도 들은 거 같은데.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무거워진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딸랑- 학교 앞에 있는 카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어서 오세요-"

 인사로 시작하는 카운터에는 여자 분이 계셨다. 분명 새로 온 알바생이 잘 생겼다고 했는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가 이 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주문을 시작했다.

 "핫초코 한 잔과 초코케이크 주문 받았습니다. 진동벨 울리면 가지러 와주세요."

 카페를 둘러보아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이랑 간간히 부딪히는 찻잔 소리.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만큼이나 크지 않은 이야기소리. 이 정도를 백색 소음이라고 할까. 도서관보다는 아니지만 책 읽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지이이잉- 책보다가 울린 진동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부스로 갔다. 그곳에서 핫초코와 초코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봤는데, 그 쟁반 위에 마카롱 몇 개가 더 올려 져있었다. , 이건 안 시켰는데?

 "저기, 주문 잘못 받으신 거 같은데..."

 ", 그거 서비스에요."

 서비스라고 말해주는 목소리는 카운터에 있던 여자 분의 목소리와 달리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말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눈이 마주치는 곳에 익숙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가 서있었다.

 "손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주는 나의 서비스."

 

 "얼마나 있다가 갈 거야?"

 "... 다음 강의가 한 시간 뒤에 있으니까 그 전까진 있을 거 같아."

 "그래? 그럼 30분 뒤에 네 자리로 갈게. 지금은, 갑자기 주문이 많이 들어와 버려서...!"

 ". 천천히 하고 와."

 아까 주문할 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그럼 그 사이에 온 건가? 만약 그 사이에 왔다면 내가 못 봤을 게 분명하다. 책 읽고 있었을 뿐더러 출입구와 등지고 앉았었으니까. 나는 케이크를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부터 일 한 거지? 전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며 준비 중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알바였을까? 그럼 그거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건가?

 "정우야, 오래 기다렸어?"

 "? ... 왔어?"

 ". 너무 보고 싶어서 주문 받은 거 빨리 끝내고 왔지. 조금 이따가 다시 가야할 거 같지만-"

 네가 내 맞은편에 앉음과 동시에 내 모든 생각이 중단되었다. 계속 생각하는 것보다 너에게 듣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여기 언제부터 일 한 거야?"

 "일 한지는 별로 안 됐어. 아직 배우는 중이라."

 "그래? 그럼 뭐 준비한다고 한 게 알바였어?"

 ", . 알바는 맞긴 한데, 바리스타를 해보고 싶었거든."

 너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바리스타...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전문직. 그것도 너에겐 분명 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정우 놀래켜 주고 싶었단 말이야."

 "뭘 놀래켜 주려고."

 "내가 이 카페에 와서 일하려고 고생 좀 했거든. 왜 이 카페로 왔는지 알아?"

 "?"

 "정우가 다니는 대학교랑 가깝잖아. 여기서 널 기다리고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생글생글 웃는 너의 모습을 바라봤다.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못해서 전보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건 맞지. 그런 이유로 이곳에 와서 나를 보며 웃는 건 조금...

 "정우야."

 "...?"

 "마음껏 공부하고 와도 돼. 나 야간타임 있어서 늦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와. 알았지?"

 "... 그럴게."

 조금... 조금 많이 설렌다.

 

 "그런데 카페엔 왜 왔어? 원래 비어있는 시간엔 도서관가지 않아?"

 "... 오늘 도서관 휴관이더라고. 마침 이 카페 기프티콘을 받게 되어서 온 거 뿐이야."

 "그래? 나 사실 아까 들어오면서 너 봤을 때 많이 놀랐어. 여기에 올 리가 없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나 했지."

 "헛것일리가..."

 ", 진동벨로 확인하기 전까지 정말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볼 수 있고 너무 좋다."

 "... 나도 좋아.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여기 새로 들어왔다는 알바생이 누군지 알아?"

 "알바생? 최근에 들어온 사람은 나뿐인데?"

 "그래? ...소문이 틀린 건 없네."

 "소문? 어떤 소문?"

 "새로 온 알바생이 잘생겼데."

 "?"

 "강의 끝나고 나면 그 얘기로 소란스러워. 기프티콘 준 애도 그 소문 확인해달라고 준 거였거든. 소문은 맞다고 얘기 해줘야겠어."

 "그런 소문이 돌았다고?"

 "몰랐어?"

 ", 난 정우한테 커피 만들어 줄 생각만 했거든. 그러고 보니 여학생들이 더 많아졌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난 잘 모르겠어서."

 "그렇구나... 일 그만둘 생각은 없지?"

 ", 당장은 그만둘 생각 없어. 난 여기가 가장 좋아. 정우도 이렇게 볼 수 있고."

 ", 그건 나도 좋아. 좋은데..."

 "좋은데?"

 "... , 나 강의 시간 다 됐다. 가볼게."

 "? , .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 끝나면 여기로 와."

 "...그럴게."

 너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가야했다. , 생각났을 때 문자해줘야지.

 「 그 카페 알바생 잘생겼더라. 그런데 가지는 마.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거든.

 이 문자를 모든 여대생들에게 보내주고 싶다.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니까 눈독 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카페에 갈 손님들이 조금은 줄어들까. 그러면 나도 카페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

 

 강의가 끝난 뒤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폈다. 역시 카페보다 조용한 공간이라 생각하던 차에 문자가 왔다. 아마도 강의 전에 보낸 문자의 답이겠지.

 「 이미 임자 있다니! 아 역시... 잘생긴 남자들은 이미 짝이 있나봐!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면전에 대고 물어봤어? 아니면 아는 사람이야?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애인이거든.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답장은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답 안하면 분명 뭐라 하겠지만, 답해서 귀찮은 거나 답 안 해서 귀찮은 건 똑같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귀찮게 또 문자가 왔다.

 「 뭐야! 답을 안 하다니. 그렇다면 선택지에 없다는 말이잖아? ~ 선택지에는 없는데 임자 있는 건 안다? 답은 하나네~ 모르는 사람이지만 임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완전 틀렸거든.

 「 아 잠깐 잠깐. 모르는 사람인데 갑자기 그걸 말할 리가 없잖아. 연정우가 모르는 사람한테 고백했을 리는 없고... 그럼 그 사람이 '나 애인 있어요.'라고 팻말이라도 들고 다니나?!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 팻말을 들고 다니면 SNS에 그게 안 뜰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묻는 걸 들었어? 엿들었어?

 「 아니. 그런 걸 누가 물어.

 「 ? 잘생겼다며. 여자들이 가만히 안 놔둘 텐데? 애인 있냐 번호는 뭐냐 묻는 사람이 하루에 한 두 명은 꼭 있을 걸? 내 초콜릿을 걸게!

 뭐? 뭘 묻는다고?

 「 그나저나 내가 문자 5개 보낼 때 연정우 답장이 하나왔다니! 평소에는 씹으면 계속 씹을 텐데, 하나라도 보낸 거 보니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 걸~ 혹시 그 사람이, 그 질문을 받는 거에 네가 신경 쓰인다면 얼른 가서 지켜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임청아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 편인데...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누가 묻는다면... 친절하게 성실히 대답할 네 모습이 싫은 게 아니다. 그냥 누가 묻는 거 자체가 싫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가방을 챙겨들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여대생들이. 정신없다. 아까보다 훨씬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거 같은데 그냥 다시 돌아갈까...

 "나보러 왔어?"

 "?"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금세 카운터 앞으로 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의 물음에 눈을 마주쳤다. 아까는 여자 분이 서있었더니 지금 서있는 사람은.

 "나 오늘 일생동안 쓸 행운 다 쓰는 거 아니지?"

 "진우..."

 "? , 주문받아야지. 우리 정우는 뭐 마실래?"

 "...나 그냥 아메리카노."

 "그래? 라떼도 맛있는데. 나중에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너는 내게 함박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진동벨을 주며 좀 이따 갈 테니 앉아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작게 끄덕이고는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운터에서 그리 멀지 않아 네가 잘 보이는 곳에. 개인 독서대를 놓고 노트북도 열어서 시선이 최대한 정면에 닿도록 하였다.

 "... ...?"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곳에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턱을 괴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누가 너에게 뭔갈 묻는 건 정말 싫을 거 같은데, 내가 그걸 들어서 어떡할 거지. 누가 애인 있냐고 물으면 내가 가서 그 애인이 전데요, 라고 할 건가. 절레절레-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왜 여기에 온 거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진동벨 안 울렸는데?"

 "내가 먼저 가져왔지."

 "...근데 서빙은 원래 안 되지 않아?"

 "너에게 오는 김에 같이 가져온 거야. 휴식 시간도 받아오고 케이크도 가져왔어. 같이 먹자."

 "그래..."

 펼쳐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잠시 접어두고 널 마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오라고 했지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어. 이 시간은 사람 진짜 많거든. 그래서 이 시간에 볼 줄 몰랐는데, 정말 나 보러 온 거 아냐?"

 ". 너 보러 왔어."

 "?"

 네 눈이 빠르게 깜빡거린다. 물음에 대답한 거뿐인데 저렇게 놀랄 일인가?

 "너 보러 온 거 맞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럼 여기서 공부하려고?"

 ". 그러려고."

 아메리카노를 들어 한 입 마셨다. 뜨거웠다. 조금 식히고 마셔야겠네.

 

 "정우야."

 "."

 "나보러 온 건 정말 기쁜데, 너 공부까지 방해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늦게 와도 괜찮아."

 "그래? 그럼 가볼게."

 "...? 이렇게 빨리?"

 "괜찮다며."

 "...찮은데. 지금은 안 괜찮아. 나보러 왔다며. 조금 더 보고가."

 가방을 집으려던 내 손 끝에 네 손이 닿았다. 가지 말라며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반짝이는 거처럼 보였다.

 "그래. 너 퇴근할 때까지 있을 거니까."

 ". ... 나 휴식시간 끝났다. 공부하고 있어-"

 네가 내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살짝 손 흔들어 주고 시선을 다시 노트북으로 옮겼다. 아메리카노는 조금 식었을까.

 "주문 받겠습니다."

 아까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소란스러움이 많이 잦아들었다. 덕분에 카운터에 서있는 네 목소리가 훨씬 잘 들려왔다.

 "진우야? 안녕! 여기서 일한다고 듣긴 했는데, 학교 말고 이렇게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 안녕. 뭐 마시려고 왔어?"

 "나 딸기 쉐이크랑 치즈 케이크 부탁할게."

 "네네, 주문 받았습니다."

 "근데 진우야."

 "?"

 "너 여자 소개 받을 생각 없어?"

 "없어."

 ", 그러지 말고~ 다른 과에 내 친구 있는데 완전 과여신 소리 듣는다니까? 근데 네가 여기에서 일하는 거 SNS에 뜬 거보고 되게 관심 있다고 했단 말이야. 한 번만 만나봐~ ?"

 "손님, 생각 없다는 사람 그만 설득하시고 여기 알람 울리면 주문하신 거나 받으러 오... 정우야?"

 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고작 한다는 게 저런 말을 듣기 싫어서 도망 나온 게 전부잖아.

 

 카페에서 도망치듯 나와 걷다보니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 내 가방. 가방까지 모두 정리해서 나올 여유가 없었다. 좀 이따... 조금 걷고 후에 진정되면 다시 들어가자. 그럼 될 거다. 그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우야...!"

 들릴 리 없을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살짝 돌아보니 언제 따라온 건지 네 모습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내게 다가온 너에 의해 내 발은 바닥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

 "갑자기 나가니까 걱정되잖아."

 "이렇게 막 나와도 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 그건 중요해. 네가 선택한 네 일이잖아."

 "정우야... 내 일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지만, 난 너를 언제든 선택할 수 없어. 난 그 어느 순간도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

 "일하고 있지만 네가 와줘서 기뻤어. 일하는 중간 중간에 널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근데 갑자기 그렇게 나가니까 너무 걱정되어서... 괜찮아?"

 "...미안."

 고개를 떨군 채 작게 사과를 하자 너는 그 두 팔로 내 몸을 천천히 감싸 안아주었다.

 "정우가 사과할 일 없어. 오히려 내가 해야지. 미안해... 널 안 괜찮게 만들어서... 아까 대화 들은 거지?"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힌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너는 내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걔는 그냥 같은 과 동기일 뿐이야. 저런 식으로 주선하려고 말 붙이고 다녀서 나도 피하려고 해. 아까는 운이 좀 나빴어."

 "...진우야."

 "?"

 "... 일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여자 소개 받겠냐는 말? 나한테는 정우뿐인데?"

 "아니... 그런 말 많이 듣냐고."

 "많이는 아닌데, 가끔 듣긴 해. 근데 나 정말 다 무시하고 있어. 나한텐 너뿐이거든."

 네 말이 진심인 것도 안다. 네 말에 거짓이 없음도 안다.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네가 어떻게 그것을 거부할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내려졌다. 다 알고 있으면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마음이 그걸 원치 않았다.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

 "?"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서 왔었어. 근데 막상 그런 말 듣는 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 안 듣겠다고 뛰쳐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되게 한심하더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는데 난 여전히 네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넌 내 말을 듣고 한참을 토닥거려주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채로 토닥임을 한참 동안 받은 후였나, 네가 나를 불렀다.

 "정우야."

 "...."

 "카페에 가방도 두고 나왔었지? 일단 돌아가자."

 "..."

 네가 손을 꼭 잡고 돌아가는 내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페에 돌아와 보니 그 여자 분도 없었고 카페의 소란스러움도 아까보다 많이 잦아들어있었다. 나는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정우야 갈 거야?"

 "있어봤자 득 될 게 없을 거 같아."

 "왜 없어? 나 있잖아."

 너는 분명 나의 득이지만, 장소도 그렇고 너에게 붙을 질 나쁜 손님도 그렇고 내게 득 될 것은 변변치 않았다.

 "... 그래도 다녀올게."

 "어디로 갈 거야?"

 "도서관 가려고. 두 시간 정도는 더..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럼 나올 때 연락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이 상황을 얼버무릴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모르겠다. 언제 꺼내든 어색해질 거 같아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버렸다. 또 내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움직일까봐. 그러기 전에 이성을 먼저 잡아두는 쪽이 나았다.

 도서관에 가자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아직 시험기간이 아니라서 자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생각을 안 하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공식을 가지고 응용문제를 33개쯤 만들고 별자리를 이루는 별을 67개쯤 외우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래는 이렇게 공부 안 하는데... 사색에 빠질 틈 없이 계속 머리를 써야만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비워진 머리로 너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자리를 정리하고 그곳을 나와 카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감시간이 다 된 카페는 밖에서 봐도 한가해보였다. 밖에서 기다릴지 안에서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안에 있던 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도 살짝 손을 흔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발견 당했는데 밖에 있으면 네가 걱정할까봐.

 "정우야 왔어?"

 ". 카페도 마감 인가봐."

 "10시까지니까. 이제 마무리해야해. 이것만 설거지하면 되니까 조금만 앉아있어."

 비어있는 자리에 아무데나 앉았다. 지금은 어느 곳에 앉아도 상관없겠지. 조용하고 한가하고, 지금은 둘이 있기 딱 좋으니까.

 "다 됐다. 정우야 이제 가자."

 "."

 너와 카페를 나와서 같이 밤길을 걸었다. 밤 산책이 아닌 함께 걷는 하굣길. 생각보다 좋은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내가 나간 뒤로 그런 질문 받았어?"

 "아니? 전혀. 그거 신경 쓰였어?"

 "...신경 안 쓰려고 노력했어."

 "공부 열심히 했나보다. 난 정우가 내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안 하진 않아."

 "무슨 생각 하는데?"

 "알바 하는데 공부에 지장은 없을까..."

 "없어! 전혀! 나도 공강 날짜에 맞춰서 조정하고 일하는 거니까!"

 "그건 다행이네."

 "다른 건? 다른 건 생각 안 해?"

 "다른 건... 글쎄. 오늘 내내 그 질문 들었나 생각밖에 안 해본 거 같아."

 "그거 말인데."

 "?"

 "신경 쓰였다고 했잖아."

 "... ."

 "네가 신경 쓰인 이유가 혹시 질투가 아닐까?"

 "...?"

 "정우가 질투하는 건가 생각했었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조금 놀랐지만, 정우가 내 생각 많이 해주는 거 같아서 기뻤거든."

 "..."

 "그런데 정말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난 정말 정우뿐이거든!"

 "..."

 "나 못 믿어?"

 대답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네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이렇게나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네 말대로 이건 질투의 감정일까.

 내 감정조차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할 때 네가 내 손을 잡아왔다. 따뜻한 온기가 닿자 손을 잡아준 너를 바라보았다.

 "그치? 나는 정말 정우뿐인걸."

 "... 믿고 있어."

 "다음부터 그런 질문 받으면 확실히 애인 있다고 말할 거야."

 "...그것도 좋고."

 "그러니까 카페에 자주와."

 "그건 생각해볼게."

 "저녁시간 말고! 9시쯤에서 마감시간 전까지면 사람도 적단 말이야."

 "..."

 "자주 올 거지?"

 "...그럴게. 시험기간만 제외하고."

 ". 그거면 충분해."

 네가 내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그 어루만짐이 느리고도 조심스러워서 애정이 담겼다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 정우야."

 그 순간 무언가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공부한 지 일주일이 지날 때 쯤 나한테 전화가 한 통 왔다.

 "연정우!"

 "왜 임청아."

 "그 카페 알바생 말야. 요즘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더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SNS에 떴었으니까, 이래볼까 저래볼까 글 올라온단 말이야? 근데 거기 댓글로 그 알바생이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분명 너랑 관련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

 "맞아. 내 애인이거든."

 "애인이었어?! 왜 나한테 안 말했어??"

 "너한테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서."

 "내가 기프티콘도 줬는데...!"

 ". 잘 먹었어. 또 먹고 싶어."

 "말이 그거뿐이야?!"

 "할 말이 더 있어?"

 "아니. 사실 없어."

 "그럼 끊어도 되지? 나 카페가야 해."

 "그래? 음~ 그래~ 나중에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카페에 들어섰다. 문을 열 때마다 딸랑- 거리며 울리는 종소리가 이젠 익숙하고 반갑기만 했다.

 "정우 왔어?"

 네가 반기는 그 목소리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은 뭐 마실래?"

 "네가 주고 싶은 거."

 "내가 주고 싶은 거? 십첩 밥상?"

 "...여기서 가능해?"

 "케이크 열 개는 가능할 거 같아."

 "...아냐. 라떼 마실게."

 "그래. 내가 예쁘게 아트해서 줄게."

 자리에 앉고 봐야할 논문을 찾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을 문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을 잠시 문서에서 뗄 때마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우연인가 했지만, 우연일리가.

 '일 해.'

 노트북을 살짝 내려 너만 보이게 속삭였다. 그러자 너는 내게 방긋 웃어 보인 뒤 시선을 밑으로 향하게 했다. 내가 일하라고 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아마 내가 논문을 다시 보면 또 어느 순간 눈이 맞겠지.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우연이 아니라 네가 나만 바라보기 때문인 걸 안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하라고 말해도 한 눈 팔 걸 알면서도 내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네가 나를 봐서 좋은 걸 알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도 좋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 일에도 네 일에도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선 내가 방향을 바꾸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겨 앉고 다시 노트북을 열자마자 지이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왜 돌려 앉았어?"

 "일하라고 했잖아."

 "일했잖아!"

 "일했어?"

 "했어! 정우꺼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트모양이네. , 고마워."

 "다른 말은?"

 "라떼 아트 예쁘다."

 "다른 말은?"

 "...오늘은 질문 받았어?"

 "그거 묻는 거야? 질문을 받긴 했는데 애인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

 "소문을 듣긴 했는데, 직접 들으니까 훨씬 낫네."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야?"

 "원하지 않는데도 말해주는 정보통이 있거든."

 "그렇구나. 근데 다른 할 말 없어?"

 "일 열심히 해. 나 계속 저 자리에 앉아있을 거니까."

 "손님도 없어서 조금 한가해도 되는데... 난 정우 보고 싶은데..."

 "손님 몰려오면 어쩌려고. 어제도 한 눈 팔다가 갑자기 손님이 10명이나 들어왔잖아."

 "그랬지... 괜찮아. 정우는 뒷통수도 예뻐."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닌..."

 "내 눈엔 예뻐. 그래서 정우야. 나 듣고 싶은 말 있는데."

 "손님 오신 거 같은데."

 때마침 들려오는 종소리에 말을 돌리고 주문한 커피를 가져갔다. 자리에 앉아 마감시간까지 논문을 볼 생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왠지 뒤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지만, 커피에서 새어나오는 열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조금 들이켰다. 한참 동안 논문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정우야, 마감시간인데."

 ", 벌써?"

 "너 그렇게 논문에만 빠져있으니까 몰랐지."

 ". 이 내용이 재밌어서."

 "난 개미와 베짱이 책이 재밌던데."

 "개미와 베짱이 책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 있는지 찾아볼게."

 "아냐 아냐 괜찮아. 나 여기 청소하는 것 만해도 바빠. 다 했으니까 이제 가자."

 네 말에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정리하여 등에 맨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방 들어주려고?"

 "동글아, 이 손은 손잡고 가자는 손이야. 물론 가방도 들어줄 수 있지만, 난 정우 손을 더 잡아주고 싶어."

 네 말에 손을 살포시 올려놓자 너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꼭 잡아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밤길을 걸어가며 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우야, 나 아직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한 너였다. 의도치 않게 무시한 거처럼 말하고 말았지만,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듣는 걸 포기하기 싫은 말인가 싶었다.

 "어떤 말?"

 "정우가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 오늘은 언제 잘 거야?"

 "정우 잘 때 쯤."

 "그럼 같이 자면 되겠네."

 "내가 재워줄 거니까. 그래서 정우야, 나한테 할 말은?"

 다른 말로 주제를 바꿔보려 한 건데 쳇바퀴 돌 듯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오늘 교수님이 새로운 주제로 강의를 하셨어."

 "그래? 그 주제가 재밌었어?"

 ". 흥미로웠거든. 요즘 내 관심사이기도 하고."

 "관심사? 어떤 거?"

 "감정에 대해서..."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살아왔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이성에 묶어둔 채 내 일에 충실하며 고등학교까지 갔는데, 너를 만나 처음으로 감정의 요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요동이 낯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중인건가 생각하며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너를 보면 이 감정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표현하기를 더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또 그 감정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인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감정이 나타난 원인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지, 나는 이 감정으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 감정으로 그 다음에 할 일을 정하여 딛고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주제로 강의해주시던 교수님의 수업내용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대답처럼 들렸었다. 내 감정이 일어난 원인이 너라면 그 결과로 나는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서 처음으로 쩔쩔맸던 그 경험이 내겐 너를 바라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할 말이 있는데."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너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너와 눈을 맞췄다.

 "진우야."

 "."

 "사랑해."

 

 내가 그 말을 건네자 너는 만족하며 기쁜 듯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다 잡지 않은 손을 올려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정우야 그거 알아?"

 "어떤 거?"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도 웃고 있는 거."

 "...난 잘 모르겠는데."

 "난 알아. 이 예쁜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싱긋 웃고 있어. 정말 예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네가 내 입꼬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놀랄 틈도 없이 겹쳐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움에서 네가 보였다.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예뻤는데, 이래도 못 믿겠어?"

 "모르... 몰라. 모르는 걸로 할래..."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정우니까!"

 네가 잡은 손을 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하니까 나도 네 걸음에 맞추어 걸어갔다.

 "정우야."

 "?"

 "나 나중에 카페하나 차릴 거야."

 ", 그거 좋네."

 "그리고 팻말을 달 거야. '정우 외 출입금지'."

 "...나 지금 회계는 나한테 맡겨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회계보다는 내 손님 돼주라. 너만 받을 거니까."

 "그럼 카페 차린 이유가 없잖아."

 "왜 없어? 정우가 오는데."

 "장사 적자 날지도..."

 "건물을 사서 건물주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 좀 나으려나..."

 "그치? 그러니까 정우는 걱정 말고 나만 바라봐. 내 눈엔 너만 보이니까."

 나에게 확신을 주는 네가 고맙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라는 이 감정이 주는 안정과 안도에 따뜻한 기쁨이 흐르는 듯 했다.

 "너에게 꼭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었어. 정우야, 나도 사랑해."

 네가 내게 전하는 진심 어린 고백이 내 마음을 잔잔히 적시는 듯 다가왔다. 너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네가 듣고 싶고 내가 해주고 싶을 때 그 말을 많이, 많이 해주어야겠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진우정우/선생×학생]

 

 

 '좋아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 따위 안하고 있을 텐데. 이 마음을 깨닫기는 참 오래 걸렸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여서 나는 솔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우 왔어?"

 "."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궁금하다고?"

 "."

 "전에도 이 비슷한 문제 가져온 거 같은데?"

 "원래 틀린 문제 또 틀리기 마련이죠."

 "그래도 정우는 잘 풀잖아."

 "아뇨.. 저도 다 잘 풀지는 않아요."

 문과와 이과가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까. 이과를 선택한 나와 문과인 선생님의 접점은 너무 적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께 오는 이유는, 이과학생이라는 편견 없이 대해준 유일한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연히 풀어본 사회탐구 영역에서 모르는 부분이 생겼었다. 해설을 봐도 이해가 안 되서 말로 듣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어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들 '이과학생이 왜 이런 걸 묻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한 선생님들은 이런 거물을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제가 궁금하다는데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혼난 뒤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선생님."

 "? 정우구나. 무슨 일이야?"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요."

 "그래? 무슨 문제인데?"

 "이거..."

 "- 이건...-"

 선생님의 설명에 바로 이해가 됐었다. 역시 설명을 듣는 게 내겐 좋았던 것이다.

 "근데 선생님은 안 말하세요?"

 "?"

 "이과 학생이 왜 물으러 왔냐, 같은 거요."

 "정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건 학생이 궁금한 걸 물으러 왔다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그런 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되는 거고."

 "..."

 내게 수학문제 풀라고 말하지 않아주었던,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오라고 이야기해주었던, 유일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준 선생님.

 그 선생님에게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자각하기란 내겐 의외로 무척 어려운 영역이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당장에 배웠겠지만, 세상엔 내가 배울 수 있는 한계와 내가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질문만 잔뜩 만들어가고 싶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었다.

 "이번 수능에 나왔다는 문제인데요..."

 ", 그렇네. 정우 이제 수능도 쳤고. 곧 졸업하겠네?"

 "...그렇네요."

 대학을 생각안 한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질문을 만들어 갈 수 없단 걸 알고 있었지만. 수능이 끝나고도 나는 이렇게 문제를 들고 왔다.

 "...졸업하면 더 이상 선생님은 못 보겠죠?"

 "왜 못 봐? 스승의 날이나, 정우 공강 날 오면 되지. 그렇지?"

 "그런가요..."

 싫어요. 그런 사제관계는 싫어요. 이제 졸업하면 나도 더 이상 고등학교 제자는 아닐 텐데.

 "...올게요."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과 다른 말이 나왔다는 걸 알고 나자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

왜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 언제든 놀러와 정우야."

 선생님의 미소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지원 넣은 대학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

 천문학과 합격. 수학과 합격. 물리학과 합격. 법학과 합격. 생명공학과 합격. 그리고,

 "여섯 개중에서 한 개만 선택해야 하는데..."

 합격한 모든 걸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은. 이미 내가 나의 한계를 깨닫고 단 하나만 공부하겠다는 결정의 마음이었던 걸까.

 "빠르면... 6년일까."

 재학과정 4년에 군대 2년이니까... . 하긴 선생님도...

 "안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한 번 뵈러 가야겠네."

 보고 싶어.

 "아니... 그냥 인사치례로..."

 보고 싶어.

 "대학 붙었다고 말씀드리러..."

 보고 싶어.

 "왜 내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좋아하니까.

 "...?"

 마음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정신이 번뜩 뜨였다. 말도 안 돼... 그냥 작은 동경심일거야. 그런 선생님은 마땅히 우상이 되실만해. 그래서.

 "그래서 그래..."

 근데 왜 매일 질문을 만들어? 왜 사제 관계는 싫다고 생각한 거야? 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왜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솔직하지 못해?

 "..."

 난 그 의문들에 변명을 하지 못했다. 대답은 하나니까. 그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난 마지막으로 합격된 학과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 지구과학교육과 합격

 

 "선생님."

 "정우야. 졸업 축하해. 선생님 보러 온 거야?"

 ". , 그리고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이번에 대학교 합격 통지서 왔는데..."

 "그래? 어떤 과 합격했어?"

 "천문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법학과, 생명공학 그리고 지구과학교육과 합격했어요."

 "전부?"

 "네 전부."

 "정말 우등생이라니까- 하지만 그 중 한 곳만 갈 수 있잖아.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 저 지구과학교육과 가려고요."

 "정했구나. 정우는 어딜 가든 잘 할 거야 분명."

 "...선생님."

 "?"

 "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근데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언제쯤 말해줄 수 있어?"

 "...아마도 6년 뒤쯤이요."

 "6년 뒤?"

 ". 저도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때 말씀 드릴게요."

 소신 있게 준비한 멘트에 진심이 담겨 선생님께 닿았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지금 듣고 싶은데..."

 "제자라고 달래시는 건가요."

 "? 아니. 정말이야. 지금 듣고 싶어. 정우야 6년은 조금 많이 긴 거 같아. 차라리 지금 말해줘 정우야."

 무얼 말할지는 모르고 분명 말하시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 또한 더 많이 배울 6년을 멋대로 낭비하긴 어렵다. 지구과학 교육과를 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서. 지금 이대로 내 마음을 말하면 선생님에 거절할 거 같아서.

 그런데 거절하는 거라면 6년 뒤에도 똑같을 수 있다. 지금 말해서 나쁠 거 없는 나의 6.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나의 6.

 이런 비겁한 변명을 덧칠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진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1차] 여장 - 3. 내꺼

 

 

 


 "...이게 뭐라고?"
 "정우가 입을 옷."
 그가 내게 생글생글 웃으며 준 옷은 굉장히 단정하고 아름답고 단아해 보이는 하늘색 옷이었다. 하늘색 배경인 것이 색깔은 곱네... 그 위이 수놓아져 있는 우아한 흰꽃은 나랑 그리 어울려 보이지도 않는데.
 "기모노...인거야?"
 "시내 구경하다가 발견해 버려서. 생활 한복처럼 편하고 가볍게 입을 수 있다나봐. 원피스같기도 하고."
 여장을 아껴둔다더니 그대로 잊길 원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옷까지 사와서 나를 당황시킨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나 혼자할 수 있는 여장기술은 지금 주어진 옷을 입는 거 뿐인데... 아, 그러고보니 옷 말고는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나... 가발 없는데..."
 "없어도 상관없어. 난 이 머리가 더 좋으니까."
 그와중에도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사락사락 넘겨주는 그 손길이 좋았다. 그래서 괜히 더 거절하기 힘든가보다. 나는 큰 용기를 얻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네가 준 옷을 꼬옥 잡고는 말했다.
 "갈아입고 올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기다린다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런데도 부족했는지 빨리 다녀오라며 귓가에서 속삭여주기까지 했다. 이런 너를 두고 내가 무슨 핑계를 더 대어 이겨야 하는가. 그냥 내가 완패인거지.
 생활한복 같다더니 확실히 입기는 쉬웠다. 일본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기모노 입는 과정은 정말 길고 섬세하였지만 그만큼 어렵지 않게, 그저 안쪽 지퍼만 위로 올려주면 끝이었으니 정말 순식간에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정말 나랑 안 어울리는데... 안경이 어울리지 않은 거 같아 벗어났더니 안경이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그냥 내가 안 어울리는 거였어.
 실망하겠네, 김진우. 실망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 돼도 않는 내 여장 때문이겠지. 앞서 했던 여장은 전부 나름 전문가의 손길이 거쳤지만, 지금은 나 혼자니까 옷 입는게 전부였다.
 악세사리같은 것도 없고, 꾸밀것도 없고. 차라리 안 어울린다고 빨리 벗으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나을거 같았다. 그럼 당장에 나가드려야지.

 

*   *   *

 


 왜 이렇게 되었지.
 "...김진우."
 "응?"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내가 만족할 때 까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자세는 날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어깨에 파묻고 있는 자세인데, 이거 너무 치사하지 않나.
 입고 나가자 그는 잠깐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을 제 시선에 고정시키고는.
 "너무 예쁘다..."
 그의 눈에 거울처럼 비친 내 모습이, 마치 그의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아낸 듯한 모습이었다.
 "진짜. 진짜, 예뻐."
 "예쁘긴... 하나도 안 어울리던데..."
 거울을 보고 또 보아도 어울리지 않았던게 당연했다.
 "연정우 정말 너무하네."
 "뭐...?"
 "예쁘단 소리 계속 듣고 싶어서 겸손한 척 하는 거 봐."
 "..."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란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 목구멍 넘어로 나오게 할까보냐... 표정을 찡그리고 있자 그가 내 머리에 제머리를 맞대었다.
 "키스할까...?"
 네 질문에 그저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좋다고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게 보이는데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 내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거... 내가 지금 여자같아서 하자는 거야?"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가만히 두질 못하겠어..."
 "가만히 두지 못하는건 뭔데. 그냥 가만히 둬도 되는데."
 "아니, 키스하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어."
 그 말을 끝내고 내게 다가와 쪽쪽 입을 맞추었다. 볼에도 쪽쪽. 콧등에도 쪽쪽. 입술 닳겠네.
 "여자 같아서 이러는 거 아냐. 연정우라서 이러는 거지."
 "예뻐서 가만 못둔다 말해놓고는..."
 "몰랐어? 정우는 학교에서도 예쁘고, 그냥 있어도 예뻐. 지금은 내 앞에서 예쁜 옷 입은 거고."
 "참나..."
 네가 다시 어깨에 파고들어 얼굴을 부빗거렸다. 간지러우면서도 짙게 남는 너의 여운이 좋았다.
 "이렇게 예쁜데. 나한테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내를 당당하게 돌아다니기나하고."
 "윽...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여장을 했든 안 했든 정우는 나만 볼거야! 내꺼야!"
 "그래... 네꺼해. 다른 사람은 줘도 안 받을테니까."
 "다른 사람을 왜 줘. 내가 있는데."
 네가 나를 안 놔줄듯이 꼬옥 끌어안았다. 마치 빈틈을 없애려는듯 그렇게 가까이에서 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동글아."
 "응?"
 "우리 키스는?"
 "......"
 침묵을 지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듣고 무시한 건 아니니까 그런 눈빛 보내지마... 나는 네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하던가..."
 네가 다시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너의 부드러운 혀가 입술을 살짝이자 입이 열리고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네가 가는 방향대로 천천히 움직여 입안을 헤집었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훑는 너에게 나를 맡겼다. 한참을 움직이고 숨이 차오를 때 쯤, 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좋다..."
 "...좋아?"
 "응. 정우 너무 예뻐서 좋아."
 너는 나를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하나라도 놓칠새라 열심히 나를 바라봐주었다. 나도 온전히 너만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정우는 어때?"
 "응.. 나도 좋아."
 "그래? 나 때문에?"
 "당연히 너 때문이지."
 "응. 하아.. 이 모습은 제발 나에게만 보여줘."
 "욕심쟁이. 베짱이 성격 어디 안 가나봐."
 "베짱이가 왜 욕심쟁이야! 아냐. 난 그저 우리 정우를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
 "그래서 욕심쟁이라는 거다. 너만 나를 독점하고 싶어하잖아."
 "사랑하니까."
 "용서되는 변명이군."
 "정우는? 나 어때?"
 "나도.. 사랑해."
 "응. 그거면 충분해. 정우는 내꺼야!"
 "그래. 그리고 진우는 내꺼고."
 "충분히 가져줘. 전부 다 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미소는 정말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무엇을 하고 있든 정말 다 용서되는 저 미소가 나는 정말 좋았다.
 "그래. 내가 다 가질게. 너도 가져가."
 "내꺼니까 당연하지."
 네가 내 손을 꼬옥 잡고 올려서 도장찍듯 손등에도 입을 쪽쪽 맞춰주었다. 참 간지럽고도 예쁜 서약처럼 보였다. 아마 그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네가 내 입가를 손으로 매만져주면 예쁘다-, 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나는 또 너때문에 웃음이 났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네꺼니까. 나 계속 여기 있을래. 어디 가지 않게 잘 잡아주는 손처럼 네가 날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만큼 널 사랑하니까.

 "다음에 또 옷 입어줄거야?"
 "안 입을거야."
 "입어줘."
 "무슨 옷."
 "웨딩드레스."
 "결혼해?"
 "할건데?"
 "정말 대책없네..."
 "신혼여행도 가고. 응? 정우야. 응?"
 "몰라... 나중에 해. 나중에."
 "너 나중에 하자고 한거다? 나 안 잊을거야."
 "프러포즈 마음에 안 들면 안하고."
 "너의 마음에 들게 할게.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꼭 보고 싶어."
 "입어도 별로일텐데."
 "아니, 우리 정우라면 분명 예쁠걸."
 "너 수트입은 것도 멋지겠네."
 "정말? 좋아. 우리 결혼하자."
 너의 진지한 모습에 다시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진지한 모습은 보기 드물어서 그런지 기대고 싶은 심리감이 치솟은 듯 하였다.
 "멋지네 김진우."
 "에쁘다 연정우!"
 네가 나를 꼬옥 안아서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몇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사랑해. 내게 이런 기대감과 설렘을 준 너를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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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을 2년 전에 쓴다 하고 그대로 놔뒀는데, 다행히 쓴 건 있어서 조금 수정하고 이어 썼어요! 흑역 투성이네요ㅜㅜ 이제 또 다른 썰 풀어봐야겠어요 ㅎㅎㅎ

[1/단편] 임청아랑 연정우

 

 

 

# 1.

 

여어어언- 저어어엉- 우우우우우-!!!”

“......”

저 멀리서 손 흔들며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향해 달려온다. 그 여자는 남자와 동갑이라 다른 호칭이 없다. 그냥 편하게 대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왜 남자의 표정은 그리도 썩어 있는가.

오지 마...”

싫은데!”

제발 오지 마...”

네가 불렀잖아-!!!”

그래도 달려는 오지 ...”

시이이이- 르으으은- 드에에에-!!!”

하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남자가 피곤한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겠지.

무거워...”

나 가볍거든!!! 많이 컸네, 연정우!!!”

입 다물고 내려와 제발...”

남자는 습관적으로 벌점을 먹이고 싶었지만 다른 학교여서 그러질 못했다. 왜 다른 학교 인거지-하지만 같은 학교라도 이런 일로 벌점 먹이는 건 불가능하다.-.

처음 만났는데 이럴 거야!!!!”

설 때 봤잖아...”

오늘 보는 건 처음이잖아!!!”

너 제발 목소리 크기 좀 줄여...”

싫어!!!!!!”

“......”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 2.

 

, 만난 김에 이것 좀 봐줘.”

뭔데.”

편지.”

편지라며 건네는 여자의 편지를 남자가 받았다. 혹시 저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읽어 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하다.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데.”

애인!”

, 애인.”

여자에게 언제 애인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한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런데도 내용이 이상했다.

애인이 누구인데.”

누구일거 같아?”

“...사람은 맞지...?”

아닌데!”

애인...이라며.”

내 애인이 누가 또 있겠니.”

“...만인의 사랑을 네 걸로 착각하지 말아줄래.”

여자의 애인 이름은 바로 초콜릿’. 여자는 흔히 말하는 초코덕후였다.

그래서 잘 쓴 거 같아 못 쓴 거 같아?”

나한테 묻지 마.”

그럼 내가 읽어 줄 테니 잘 들어봐.”

여자는 남자에게 건넨 편지를 다시 뺏어 들어 큼큼,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자신이 쓴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본 그 어떤 것 중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답다. 그렇게 멋진 너에게 나는 내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써가며 고백한다. 앞으로 너만 사랑할거고, 앞으로 너만 바라볼 거다. 그러니 나의 마음을 받아줘. 난 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넌 멋지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달콤하고 맛있고... 난 너의 피부색이 어떻든 다 좋아할 수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 꿈에도 네가 나올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나의, 초콜릿.”

“......”

-필자가 약속한 청아 고록을 완성했다. 낚고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다.- 남자는 이상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애인한테 보내는 거라며. 이건 고백 글이잖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답장이 없으면 수락이지!!!”

“......”

남자는 할 말을 잃은 참이었다.

 

 

# 3.

 

정우는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에게 묻는다. 남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어라라, 무소식이 희소식? 정말 생긴 거야?”

“......”

뭔데 뭔데, 누군데 누군데???”

“...몰라 묻지 마...”

정말? 연정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 설마 내 애인은 아니지...?”

“...?”

내 애인은 안 돼!!!”

초콜릿은 아니거든...”

, 그럼 제대로 사람이라는 거네! 누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람.”

오오... 연정우가 드디어 사람을... 사람을... 어떻게 생겼어???”

“...잘 생겼어.”

이름은???”

굳이 아려는 이유는...?”

궁금하니까!”알아서 뭐하게...”

리재현한테 말하려고!”

“...걔는 누군데.”

초코동맹 회원!”

말해서 뭐하려고...”

초코동맹에 오라고 꼬시려고. 강추!!!”

“......”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죽어도 여자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고 또 한 번 다짐한다.

 

 

# 4.

 

넌 근데 왜 이리 신났어.”

우리 정우 만날 생각하니까 신나서!!!”

“......”

사실 여자와 남자는 사촌이다. 동갑내기 사촌. 외가 사촌이기에 성이 다르다. 어렸을 때 같이 다닌...

정정하시지. 끌려 다녔거든.”

? 누구한테 말하는 거? 연정우 드디어 미친 거?”

“......”

...끌려 다닌 터라 나이를 먹어도 서슴없이 잘 지내고 있는 편.

그나저나 어렸을 때는 참 우리 정우 귀여웠는데~”

어렸을 때 임청아는 사내 대장부였지.”

말 다했냐.”

여자의 머리 위에 빠직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만 무시하는 쪽으로 남자는 생각했다.

“...여행가고 싶어서 그런데 돈 빌려줘.”

?? 뭔 여행?? 랄까 돈 없거든!!!”

돈 많잖아.”

우리 회원님 먹여 살리느라 바빠. 당충전은 꼬박꼬박 해야 하거든.”

흐음,”

게다가 여행이라면 한 두 푼 아니잖아? 그렇게 큰 돈 없단 말이야.”

그렇군... 그럼 돈 빌리는 건 포기. 이제 각자 헤어지자.”

잠깐 잠깐, 연정우씨? 지금 이 누님을 고작 돈 얘기 하려고 부르셨나요???”

누님은 무슨... 내가 생일 빠르거든.”

그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앙? 얼른 돈 빌리려고 했던 목적이나 불어!!!”

말했잖아, 여행이라고.”

그거 말고!!! 여행의 본 목적 말이야!!!”

 

 

# 5.

 

아 그러니까, 으음- 그래서 그러니까, 으음-”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남자가 여자를 만난 목적은 사실 돈 때문이기도 했으나,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촌인 여자를 만나면 여자의 멍청한 회로 때문인지...

누가 멍청하데?!”

맞는 말 했는데 왜 그래.”

우씨... 들리니까 열나네...”

...그래서 그랬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시간이 지나가는 걸 만끽 할 수 있었으니까.

여하튼 오늘 만나서 나름 즐거웠어, 임청아.”

계속 말 돌릴래? 여행 목적이나 불어.”

아까 알아듣는 척 다 해놓고 뭘 하라고?”

그렇게 하면 좀 똑똑해 보이는 줄 알았지.”

누구도 너 똑똑하게 안 봐. 근데, 여행 목적을 말하면 나한테 돈이 생기나?”

들어보고 타당한 이유가 된다면, 조금은 용돈으로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럼 들어봐. 내가 여행가는 건...”

속닥속닥-, 소곤소곤-, 웅얼웅얼-, 중얼중얼-.

지금 사귀는 애인하고 여행가고 싶다고?!?!?!?!?”

“......”

여자의 성격을 아는 남자였지만, 얘기하고 나니 부끄러움은 남자의 몫이 되고 말았다. 남자도 자신이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가 후회중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타당한 이유는 초코투어 뿐인 걸. 넌 안 되겠다.”

“...그래. 안 될 거 같았어.”

남자는 덤덤히 이어 대답했다.

그래야 임청아 답지.”

역시 날 너무 잘 알아.”

 

 

# END.

 

즐거웠다, 정우아우.”

어디서 아우를 붙여. 생일은 내가 빠르다니까.”

하지만 정우형 보단 정우아우가 더 입에 착착 붙는데.”

오빠란 호칭은 어디가고.”

정우오빠는 너무 오글거리지 않냐? 그러니까 패스. 대신에 따라해 봐. 청아누나- ”

입 다물어, 청아꼬맹이.”

. 꼬맹이??? 야 연정우 말 다했냐!!!”

응 다했다, 꼬맹이. 고로 오늘 잘 가고 추석 때 보자.”

겨우 추석 때냐! 중간에 좀 보자구!!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고!!!”

너랑은 싫네. 그럼 잘 가.”

, 그래 잘 가라. 가다가 꼬꾸라져 버려.”

너나.”

 

서슴없는 모습은 참 좋다. 필자는 또 언제 이 둘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쓰는데 나름 재미있었으므로 또 언젠간 풀지 않을까 싶다

[1차 연성] 白夜

 

 

 

# 1.

 

 첫 기억은 눈물도 흘리지 않던 부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모습조차도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그 손에 이끌려 돈이 많다던 그 커다란 집에 도착한 것은 잊혀 지질 않는다.

 ‘사랑한단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작은 나를 꼭 껴안고 나서는 도망치듯 커다란 집에 나를 두고 떠났다. 그 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이름이 없던 것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이름도 참 내키는 대로 불러댔으니 그 땐 전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남자 아이만 이름이 있고 여자 아이는 이름이 없다고, 오라비는 멋진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커다란 집에 오게 된 것도 다 오라비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라비 장가갈 날은 다가오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는 나를 커다란 집에 팔아 넘겼다. 부잣집이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주인집 양반이 나이도 찼는데 혼인을 안 한다는 둥의 소문이 안 좋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안 좋은들 돈이 필요하니 딸까지 팔아버리는 인간들의 양심이란,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름이 무엇이느냐.”

 “이름이 없사옵니다.”

 “이름이 없으면 무엇이라 불렸느냐.”

 “봄에는 꽃분이요, 여름에는 점순이라 불렸고, 가을에는 낙랑이라, 겨울에는 설령이라 불렸사옵니다.”

 

 이름이 없어 보이는 대로 불렸다는 것을 참 시적으로 말하고 나니, 8살이 말하기에는 참 덤덤히도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8살답지 않게 칭얼거리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으며 그저 차분하고 어떻게 보면 어른스러운. 약간의 흑역사도 곁들여지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붙여줘도 괜찮겠느냐.”

 

 나를 보며 묻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 발에 맞추어 서 있자 무릎을 굽혀 내게 눈을 맞춘다. 동의를 얻는 듯 한 당신의 묘한 눈빛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리에 손을 대고는 당신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 ‘백야(白夜)’이니라.”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자 나의 검었던 머리는 흰색으로 물들었다. 희고도 하얀 머리와 빛을 못 봐 그을리지 못한 피부는 환상의 조합이라도 되는 마냥 나를 투명하게도 빛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하얀 머리와 하얀 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2.

 

 “나으리, 소녀 혼인시켜주시어요.”

 

 돈이 권력인 것은 그 시대에도 당연했다. 돈으로 벼슬을 사는 시대도 있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돈을 아끼는가. 내게 나으리라고 부르라 하던 당신도 그 돈으로 나를 공부시켰다. 서당을 다니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반대로 스승을 집으로 불렀다. 공부 좀 했다는 스승도 처음엔 나를 성별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거부하려 들었지만 돈은 많이 주니 일단 가르쳐보았는데 사내보다 영특하다며 나중에는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었다더라. 그 말에 우리 나으리 한사코 거절했다지만.

 

 “혼인...이라 하였느냐.”

 

 공부하던 어느 날, 스승이 내게 물었다. 시집은 언제 가겠냐고.

 시집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리 자각시켜주니 문득 내 나이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 이팔청춘마저도 넘긴 소녀 나이를 보시어요.”

 

 나으리에게 온 것이 8살 때. 그리고 나으리 밑에서 산지 어언 10.

 그 당시 내 나이 18.

 그 때 나으리의 당황하고도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내는 있고 말하는 것이냐.”

 “... 그것은 없으나, 그래도 혼기 찬 여인이 혼자 사는 것도 문제라 들었사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혼인시켜 달랬으니 우리 나으리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내도 없으며 어찌 혼인을 시켜 달라 한 것인지, 혼인을 할 돈은 있는지, 혼인을 한 뒤의 계획도 있는지 등등. 물론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혼이 전부 털렸다.

 

 “그래도... 소녀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시지 않으시어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거야 나으리도 혼인을 하실 게고, 저도 혼인을 시켜 주실 게고... 어찌 되었든 소녀를 죽을 때까진 데리고 있으실 생각은 없으실 거 아니어요.”

 

 아무리 돈을 주고 사왔다 한들 노예보단 양딸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에 나으리도 딸의 혼인 정도야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 알았다. 물론 우리 나으리가 오랜 세월동안 혼인 안 했다고 말은 많았으나, 나으리 정도의 미모이면 그 아무리 40살이라 한들 누구든 혼인 하겠다 줄을 설 정도였다. 게다가 설마 나와 혼인하고자 나를 사왔을까. 나으리의 행동을 10년간 봐왔기에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나으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

 “무엇보다 넌 인간도 아니지 않느냐.”

 

 나으리는 나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셨다. 그리고 나으리는 내게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생각을 그만두었다. 저것은 그저 나으리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단순한 사고가 참 우스웠다.

 와하하,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내가 너에게 이름을 준 날부터 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 보아라.”

 

 나으리는 내게 보아라, 명하셨고 나는 그저 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으리 뒤쪽으로 무언가 하얗고 커다란 게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꼬리를 닮았사온데... 그것이 무엇이어요? 나으리 뒤에 짐승이라도 있으시어요?”

 “이것은 내 꼬리이다.”

 “...?”

 “나는 본디 인간이 아니라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九尾狐)란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나의 뒤쪽을 만져보았다. 무언가 만져지자 그것을 잡아 크기를 가늠하였는데, 그것은 작고 따뜻하고 복슬복슬하며 자신만의 자아가 있는 듯 내 손에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것에 대해 이질감이 들어 그것을 확 놓고 말았다. 누군가 내 뒤에 작은 강아지가 꼭 붙어 안 떨어지는 것이라 말해주었음 할 정도로,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나으리...”

 “10년 간 그 정도의 꼬리가 자란 것이니라.”

 “하지만 소녀는... 전혀 몰랐는데...”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네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꼬리도 안 보일 것이니라.”

 

 인생 18년 째, 처음으로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 뒤로부터 모든 행동에 심혈을 기울여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거 잊어도 애초에 여우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기 무방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안 후 부터 나의 혼인 이야기는 쏘옥 들어갔다.

 

 “어찌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닌 영물이래도 달아나지 않느냐.”

 “달아나서 소녀에게 득 되는 것은 무엇이 있사옵니까.”

 “어딘가로 달아나 구미호가 된 것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럼 무엇 하옵니까. 10년이 지나도 나으리께선 변한 것이 하나 없는데 소녀라고 오죽 하겠나이까. 그리고 이미 팔려 온 몸, 나으리가 거두어주셔서 감사하온데 어딜 가서 또 간사히 몸을 챙긴단 말이옵니까.”

 

 구미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나으리는 이제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공부를 한 덕인지 나으리 곁에 있는 것이 훨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내가 달아나서 무엇하리오. 나는 그렇게 나으리 곁에서 구미호의 삶으로 더 살게 되었다.

 

 

 

# 3.

 

 200년이 지났다.

 구미호로 산 지 어언 200. , 시간 참...

 

 “빠른 거여요?”

 “무엇이 말이냐.”

 “200년이란 시간 말이어요.”

 “빠른 것이라 느끼느냐.”

 “어림조차 못 하겠사와요. 나으리는 어떠신지요?”

 “내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느니라.”

  

 나으리의 말에 나는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꼬리 하나에 100년을 산다는데 이 900년 하고도 나와 200년을 더 사신 나으리온데. 1100년 이란 세월은 정말 어림할 수가 없었다.

 200년 간 외모가 바뀌지 않았다. 겨우 100년에 한 살 먹는 속도로 성장이 늦어지는 기분이었다. 고로 나는 인간 나이로 20살 쯤. 다들 혼인하고 아이 낳을 때 나는 200년을 살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아무렇지 않는 것이.

 한 곳에 약 20년을 머물다가 거처를 옮긴다. 빠르면 10, 좀 괜찮으면 25. 그러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노년층이 있다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웃어넘긴다. 그것이 다였다. 처량하다. 본인을 본인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남을 부르듯 웃어넘기고.

 

 “나으리는, 인간이 되고 싶사옵니까?”

 “...어떤 여우는 그리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여우 말고, 나으리 말이어요.”

 “...나도 되고 싶었다.”

 “왜요?”

 “긴 삶을 사는 건 너무나 혹독한 일인 것을 알았으니.”

 

 100년도 안 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라고 하니 당연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당신은 버티기 힘들었겠지. 꼬리하나가 자랄 때 쯔음 이미 다른 이들은 사라지고 없으니까. 나를 거두어주신 당신은 참 정에 약한 여우였다. 더 인간다웠다. 인간이 되고 싶던 이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시온지.”

 “지금은, 그러려니 살고 있다. 너도 있고.”

 “...그럼 소녀를 구미호로 만드신 이유는 소녀를 나으리 곁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사옵니까?”

 “...비슷한 명분이라 일러두겠느니라.”

 

 200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었는데도 난 아직 나으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 많은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왜 나으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까. 차암, 이리 아버님 같은 분을 나는 그리 오래도 따랐다. 마치 숨기시는 게 많은 아버님 같은, 그런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숨기려고만 한다.

 

 “소녀도 인간이 될 수 있사옵니까?”

 “그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허지만 인간을 여우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로 여우도 인간으로...”

 “나도 그리 인간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

 

 구미호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구미호가 되는 일은 내가 처음이지만,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거듭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이지?

 본래 인간이 구미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구미호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 4.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자 하니 나으리가 안계셨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일이 요즘 잦아지셔서 오늘도 그러시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변수가 좀 있는 날이었다.

 

 “, 자네 있는가?”

 

 누군가를 찾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왔다. 그 손님이 누군지 모르고 누구를 찾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누구시어요?”

 “자네는 누구인가?”

 “...소녀는 백야라 하온데...”

 “나는 린이라 하네.”

 “그래서 누구시어요...?”

 “그건 내 나중에 알려주겠네.”

 

 그는 참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갓을 쓰고 훤칠하게 생긴 사내는 나보다 키가 컸기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연, 있는가?”

 “...? 혹 나으리 말하시어요?”

 “나으리, 라 부르는가?”

 “. 그리 부르옵니다.”

 

 그러고 보니 나으리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으리의 이름은 인가. 처음 듣는 나으리의 이름이었다. 헌데 나으리는.

 

 “나으리는 지금 집을 비우신 상태이옵니다.”

 “집에 없는가?”

 “.”

 “흐음.”

 

 그는 자신의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 .”

 

 손님은 나으리의 친구일까. 나는 그가 들어오자 부엌으로 가서 마실 것을 내어왔다.

 

 “드시어요.”

 “고맙네, 그래.”

 “나으리는 어인일로 찾으시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 내 오랜 친구가 보고 싶어서.”

 “..., 그런데 나으리는...”

 “나는 연의 오랜 친구인 기린이라네. 자네는 구미호인가?”

 “.... 구미호이옵니다.”

 

 나으리의 친구라는 그는 해태같이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기린이었다.

 

 “연은 언제 오는가?”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근래에 일찍 나가시어 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잦으시긴 하온데...”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 ...”

 

 무언가를 아는 듯이 다시 턱을 쓰다듬는 그 분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찰나 내게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나와 친구하겠는가?”

 “?”

 “나는 그리 연과 친구를 하게 되었다네. 나이는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을게야.”

 “하지만 나으리 친구분이시면...”

 “괜찮네. 우리는 어차피 불멸의 존재이니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나와 친구하세. 백야였는가?”

 “.... ‘백야가 소녀의 이름이옵니다.”

 “말 놓으세. 편히 부르게나.”

 “...그리 하도록 노력해 볼 테니 재촉 좀 하지 마시게나...”

 “허허, 알겠네 알겠어.”

 

 나으리가 집을 일찍 나가신 날, 나는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었다. 하지만 나으리처럼 계속 같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만날까 말까할 정도였다.

 어쩌다 만나면 참 기뻤다. 왜냐면 그 날 나으리가 나가시고 전혀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쭉 혼자였기에 어쩌다 그를 만날 때마다 참 기뻤고 혹여 나으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도 나으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시겠지, 그리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산지 몇 년이 지났던가.

 

 

 

# 5.

 

 “몇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이 흘렀지.”

 

 때는 한 여름. 나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 내 앞에 있는 빈자리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지내었는가?”

 “보시다시피? 너는 어때.”

 “나도 보시다시피 지내내.”

 

 내가 어디를 가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내었다. 그건 우리 나으리 때부터 그랬다던데. 떠돌이 생을 사는 그라지만, 그도 어쩌면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마실래?”

 “시원한 커피로 부탁하네.”

 “내가 사는 거야?”

 “그러려고 내게 물은 거 아닌가?”

 “맞아, 사줄게.”

 

 나는 피싯-, 웃고는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주었다. 같이 지낼 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게 몸에 배었다고 해야 할까. 그 옛날에도 돈이 많았지만 쓰는 법을 잘 몰라 가만히 두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쓰고 있다.

 

 “요즘은 어찌 지내는가?”

 “요즘은, 친구들이 생겼어.”

 “나 같은 친구들이 말인가?”

 “. 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나만큼 오래 살 친구들.”

 “오호, 어찌 만났나?”

 “살 곳을 정하다가. 하숙집이라 길래 처음엔 꺼려졌었는데 그 집주인이 내 정체를 그냥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만나게 됐지.”

 “그래서 재밌는가?”

 “당연하지.”

 

 그를 위해 시켰던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는지 진동 벨이 울렸다. 그에게 벨을 쥐어주며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으리는, 아직도 못 만났어?”

 “? 으응, 아직도 못 만났네.”

 “...어디서 잘 살고 계실까?”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 믿게나. 연이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

 “하지만 나한테 말없이 가실 분이 아닌데...”

 

 약 200년 같이 살았지만 그리 믿음이 없으신 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세월에 무뎌져 그의 말대로 어디서 잘 계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너도 하숙집에서 살 생각 없어? 방은 집주인이 만들어 줄 텐데.”

 “미안하지만 난 떠돌아다니는 게 더 즐겁네. 어디 발 묶여 있는 건 질색이라네.”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 권유할 생각은 없지만.”

 “그거면 됐지 또 무얼 바람세.”

 “그냥. 시간 날 때 나 만나러 와주는 거.”

 “그거라면 언제든 그래줌세.”

 “또 나으리 이야기도 해주고.”

 “거거, 연의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나.”

 “700년은 더 들을 수 있어.”

 “벌써 그만큼 세월이 지났나?”

 “. 벌써 꼬리 아홉 개인걸.”

 “차암, 처음에 만났을 땐 겨우 두 개밖에 안되지 않았나.”

 “세월 가는 대로 산 거 뿐이지, .”

 

 말을 편하게 주고받는 이 관계가 참 편하디 편했다. 오랜 친구라 그렇겠지. 이제 내게도 오래 될 친구들이 생겼으니 외로울 일은 없겠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은 지 오래 되어서 그 감각이 무뎌졌지만, 다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난 가보겠네. 커피 잘 마셨네.”

 “, 잘 가고. 백 년 안에는 보자.”

 “그럼세. 잘 있게나.”

 

 그가 가고 나자 나도 내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나를 반겨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아,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 사가야겠다.

 

 “이쁜이들, 보고 싶다!”

 

 

 

# 0.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나와 같이 지내려는 누군가가 없었다. 같은 구미호래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따르려하지 않았고, 인간과 같이 사려니 내가 너무 오래 산다. 이별을 겪기엔 너무 많은 이별을 겪을 거 같기에. 그런 아픔을 갖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구미호는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할까. 오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또 무엇이고.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이 구미호로 될 수 있을까?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구미호의 기를 인간에게 주면 그 인간은 구미호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구미호가 되고 싶다고 할까. 게다가 아직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게다가 그런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인 마냥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긴 세월을 외로이 지내는 것보다 누군가와 부대끼는 짧은 삶이 편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간이 되거나, 누군가 긴 세월을 함께 할 이를 찾거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스르려는 내가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상의 이치가 낮과 밤으로 나뉜다면, 그 이치를 깨끼 위해 살아가는 나는 모순인가.”

 

 구미호는 오래 살기에 인간과 함께 살면 안 된다. 그들의 이치와 우리의 이치는 다르기에 그들은 우리를 그저 요물로 보고 처단하려 든다. 그래서 우리는 숲속에 숨거나 인간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본 모습을 들키지 않게 살아야 했다. 세상이라는 빛에 우리는 타들어가지 않게 어둠 속에 숨어 살아왔다.

 언제까지 어둠에 있어야 하는가. 언제쯤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을까. 구미호가 인간이 되면? 아니면 인간을 구미호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면?

 

 “하얀 밤...”

 

 그 밤을 보고 싶다. 어두워도 어둡지 않고 낮의 빛으로 같이 물든 그런 밤. 해가지지 않아 세상 만물이 보이는 그런 아름다운 밤.

더 이상 우리들도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

 

 “내 언젠간 그 밤을 보리라.”

 

 그 밤을 보고 그 밤을 곁에 두어 내 한생 끝날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두리라. 그리고 이 생명 끝날 때 쯤, 나는.

 

 

-

 

 

 툭-

 상가 길을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예전이었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생각과 다르게 휘청거린다. 곧 넘어질 거 같다. 하지만 부딪힌 상대가 내 팔을 부드러이 잡아주었다.

 

 “고맙네...”

 “괜찮사옵니까? 소녀가 부딪힌 것이어요. 소녀가 잘못했사옵니다.”

 “나는 괜찮네...”

  

 익숙한 목소리. 나는 상대를 알아보았지만 아마 상대는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날 알아보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있다.

 

 “소녀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어도 괜찮사와요?”

 “괜찮네. 혼자 갈 수 있네.”

 

 참, 변한 것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하얀 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자신이 하얗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이리도 아름다운 빛을 큰 전모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도 보고 싶었던 하얀 밤조차도 아직도 어둠 속에 있으니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서 가보게나.”

 “. 어르신도 살펴 가시어요.”

 

 상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를 지나쳤다. 나는 나이에 맞겠거니 싶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대로 헤어지면 좋겠건만.

 

 “연어르신!”

 

 누군가 내 옛 이름을 불러 날 세우는 게 아닌가. 날 부른 이는 내가 가르치는 제자 중 한명이었다.

 

 “그건 옛 이름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직접 지은 호로 불러주게.”

 “, 죄송합니다. 흑주(黑晝)어르신. 여쭙고 싶은 게 있어 모습을 보이실 때 급히 불렀습니다.”

 “괜찮네. 무엇을 물으러 왔는가.”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얀 밤이 지나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얀 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하얀 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얀 밤 또한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나는 집을 나갔다. 하얀 밤이 자신의 정체에 적응이 될 때 쯤, 내가 점점 인간이 되어갈 때 쯤, 내가 사라져도 나대신 모든 것을 잘 짊어지고 갈 수 있으리라 확신이 설 때 쯤 나는 그리 나갔다.

 그리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0년 전 집을 나온 이래 난 내 지혜로 인간들을 가르치며 살아갔다.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그들과 같이 부대끼며. 내가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부터 나는 내 본 이름에 검은 낮이라 호를 붙였다.

 ‘흑주 백연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이 있다면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낮도 있으리라. 대낮에 당당히 거리를 거니는 어둠. 빛을 받아도 그 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 어둠을 그리 칭하리라.


[#魔女集会で会いましょうby 나쵸] 어느 마녀의 이야기 - 너와의 사계절



 옛날 옛날  어느 숲 깊은 곳에, 늙지도 죽지도 않는 저주에 걸린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녀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연현상부터 그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까지, 마녀는 모든 현상과 신비한 힘을 깨우쳐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녀는 자신이 신비한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힘은  누군가의 나이를 나눠줄 수 있는 마법의 힘이었습니다. 마녀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필요한 희귀초를 많이 얻고 싶었을 때였습니다. 다 자란 희귀초와 희귀초의 씨앗을 두고 마법을 쓰면 다 자란 희귀초는 덜 자란 상태가 되고 씨앗은 새싹이 돋아나 빠른 시간 안에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식으로 마녀는 짧은 시간안에 많은 약초를 얻어 더 많은 것을 알아갔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마법을 더 많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생물에게 마법을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다 자란 식물의 나이를 빼앗아 다른 식물의 나이를 늘려도 보고 늙은 동물은 젊게, 어린 동물은 늙게도 만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이를 늘린 식물은 눈깜짝할 사이에 말라 비틀어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바꾼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빠른시간에 나이를 먹은 동물들은 걷는 법, 사냥하는 법, 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해 생태계에서 살아남지 못해 죽고, 나이가 줄어든 동물들은 결국 다시 나이를 먹고 죽었습니다.

 마녀는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떠한 생명을 자신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게 만들어보기 위해서 자신의 마법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한 생물을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하려면, 다른 생물들은 끊임없이 일찍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녀는 한 생물에게서 뺏은 나이를 자신이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멀쩡할줄만 알았습니다.

 그 마법을 쓰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 살아온지도 오랜 세월, 어느 날 마녀는 또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게 내 손에 닿았던가?'
 평소에 닿지 않던 선반이 손에 닿자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몸이 '성장'하고 있던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나이가 자신을 '성장'시킴을 깨우쳤습니다. 늙지도 죽지도 않은 자신이 '성장'했다는 건 자신도 언젠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나도, 내 힘도 결국 자연의 섭리는 못 거스르나보네..."

 마녀는 그 뒤로 더 이상 마법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다시 마녀 혼자 삽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 겨울

 차갑다. 원래 이리도 차가운 곳이었나. 몇 십년 전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이젠 네가 없으니 내 집이 이리도 차가운 곳인가 싶다. 그래도 나는 나가야 한다. 오늘도 필요한 약초를 캐야하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었다.
 너를 처음만난 곳은 바로 이 현관이었다.

 응애- 응애-
 추운 어느 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처음엔 환청인줄 알았다. 춥기도 춥고 어느 길은 미끄럽기도 해서 이 겨울 날 현관을 열기 싫었는데 고양이도 냐옹거리며 현관문을 벅벅 긁는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보니 그곳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네가 있었다.
 "뭐야 이거?"
 너를 보기 위해 쭈그려 앉아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너말고도 쪽지도 함께 있었다.
 "음... 잘 안보이네... 노안이 왔나... '아기를 잘 부탁드립니다'...겠지? 아기는 처음 키워본단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쪽지와 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를 어쩐다 싶었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굉장히 멀기도 했고, 이 추운 날 딱히 마을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추운데 여기 둘 수도 없고."
 그렇게 나는 어린 너를 안아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나와 너의 첫 만남이었다.


# 봄

 현관을 나와 내가 자주 약초를 캐는 들로 나왔다. 이곳은 여러 약초가 있지만 여러 식물도 많았다. 그 중에는 키 큰 식물들이 무더기로 자란 곳도 있는 데 나는 그곳을 기피한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하면 그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녀님은 왜 키가 안 커요?"
 말도 못하던 아기가 십년도 안 됐는데 벌써 나만큼이나 키가 커졌다.
 "그건 불로불사라서 그래."
 "그게 뭐에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나는 키가 작다. 그건 이 어린 모습으로 죽지않고 살아가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럼 나이를 안 먹어요?"
 "...아니, 먹을 수는 있어."
 "어떻게요?"
 "다른 것의 나이를 가져오면."
 "나이를 가져와요? 어떻게요?"
 "내 힘을 사용하면 가능하지."
 "그럼 가져오면 되지 않아요?"
 너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힘을 안 쓰는 이유를 이해하기에는 이 아이가 아직도 어렸기에. 그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난 이대로가 좋으니 너나 많이 먹으렴."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너는 입을 삐죽 내민다. 그것 조차도 성장하는 널 보는 즐거움인가 생각하련다.


# 여름

 약초를 캐는 곳 옆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너는 그곳을 유독 좋아했는데, 이곳에 온 김에 한 번 가보도록 할까. 내가 그곳에 가면 너는 꽃을 따는 뒷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줄것만 같았다.

 "나도 너처럼 커지고 싶게, 왜 그렇게 커진거야?"
 인간은 참 신기하다. 고작 20년 밖에 안 지났는데 나보다 한참 작았던 아기가 저렇게 커지다니.
 "불로불사잖아요~"
 내게 웃으며 말하는 너는 내게 꽃다발을 내민다.
 "오늘 꽃이요."
 나는 뾰루퉁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네가 건내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아-, 향기 좋다.
 "거기서 꺾어온거야?"
 "네, 여름이라 그런지 꽃이 많이 피었더라고요."
 나는 꽃을 화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곤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꺾어 온 것만으로 이미 죽었을텐데, 물에 담그면 다시 살아나는 건 참 신기한거 같아."
 "그런가요?"
 "응, 나는 죽었다 살아나게 하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거든."
 "그럼 나이를 나눠주는 마법은 어때요?"
 "...그건 안 쓸거야."
 "그래요?"
 "응,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거든."
 화병에 담긴 꽃을 톡톡 건드려본다. 생기를 머금은 꽃이 시들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이번엔 너에게 다가가 톡톡 건드려본다. 내 키에 맞춰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싱긋 웃는 모습으로 내게 짧게 묻는다.
 "왜요?"
 "아니 그냥."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나의 말을 받아 듣는 너.
 "다음에 꽃 꺾으러 갈 땐 같이 가자고."
 "네, 그러도록 해요~"
 그 어려운 것을 이해할만큼 훌쩍 커버린 네가 참 대견스럽다.


# 가을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이름모를 들꽃이라도 몇몇개의 꽃은 이름을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코스모스이다. 보라색 자주색  분홍색 하얀색의 코스모스 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는.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너를 보고는 너의 손을 잡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쓴다면...
 "마법은 안돼요..."
 너는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힘겹게 입을 연다.
 "...하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저에게 예전에 그 말을 하셨던거 기억나요?"
 너의 말에 작게 끄덕였다. 난 나의 마법을 스스로 안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주었고, 너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그 나이에서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키셔야 돼요. 당신의 선택에 예외를 두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저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렵니다... 부디 당신이 제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나날이 힘이 없어지는 너를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야 있었다. 너를 위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 나의 최선은 네가 내 곁에서 더 머물 수 있게 약을 지어주는 것뿐,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네가 힘겹게 잡은 내 손 위로 힘없이 손이 풀리던 날, 나는 너를 위해 해준 것이 없어 그저 그 손을 꼭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요."
 내게 마지막까지 웃으며 말해주던 그 한마디가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해 눈을 감았다.


# 또 다시 겨울

 꽃길을 따라 그 끝으로 가면 그 어떤 꽃들도 없는 곳에 닿는다. 꽃이 없는 그 가운데에 오똑이 서있는 하나의 비석. 나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이곳만이 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역시 너랑 살지 말걸 그랬다... 나한테는 너무 짧은 시간이야,  너랑 보낸 시간들은..."
 이곳만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내뱉으며 너를 향해 울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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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 첫사랑

 

 

 

 

 

 중간고사가 저번 주로 끝이 났다. 끝났다고 너부러지는 것들이 한심하여 혀를 차고는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자 책을 폈다. 시험이 끝났다고 흐트러지면 안 된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큰 짐을 짊은 우리에게 선조들은 공부의 끝은 없다고 하는데 어찌 연필 들기를 마다하는가.

 ...어쩌면 마지막으로 본 시험이 고전문학이라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된 걸지도 모른다. 조금의 휴식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안 쉬고 싶어도 쉬게 될 것을 굳이 난 왜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흘러나와 아무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

 아, 진우 보고 싶다.

 

 

 

* * *

 

 

 

 수업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칠판에 무언가를 적으시는데, ...? ‘자습’?

 “오늘 선생님이 회의일로 바쁘니까 이 시간만 자습 좀 할게. 어차피 시험 끝났으니까 한 번 정도는 쉬게 해주려고 했고. 영화보고 싶으면 영화보고 자고 싶으면 자고 공부하고 싶으면 해도 돼. 반장은 애들 조용히 시키고.”

 저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교실을 유유히 떠나셨다.

 ‘자습’. 자습이라니. 차라리 수업을 하면 좋았을 것을 자습이란 이름으로 얼버무리게 되었다. 배운 게 있어야 복습이라도 할 텐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으므로 예습을 하고자 다시 책을 폈다. 지금 잠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시시콜콜한 영화는 별로 보기 싫다. 내 눈앞에 있는 글자에 집중하며, 학습지도 펴서 문제도 풀어보았다.

 응, 살맛나네. 누구는 미쳤다한들 내가 살 거 같은데 그 누가 트집 잡고 늘어지는가. , 한 명 정도 있으려나.

 어쨌든 이 시간만 끝나면 점심시간이 온다. 오늘 점심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종이 치자마자 아마 볼 수 있는 얼굴에 머릿속에선 벌써 함박웃음이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자습시간에 좋은 점이 있다면 선생님이 안 계실시 종이 치기 전에 조금 일찍 반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5분 정도는 눈 감아 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 됐달까. 그전에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나쁘지 않네.’로 생각이 바뀌었다.

 저번 주까지는 시험이라서 내 부탁으로 같이 점심 먹는 것이 금지-점심시간에도 공부해야 하는 게 이유였다.-였었다. 시험 끝나고 오늘은 꼭 점심 같이 먹자고 매달렸던 그였기에, 나도 얼굴 마주보며 밥 먹고 싶은 마음이 태산만큼이나 부풀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종이 치고 나서 지나는 시간조차도 아까워 미칠 거 같았다.

 종치기 1분 전까지는 가만히 있는 편이다. 그래도 곧 종칠 거 같을 때 쯤 일어나 살며시 교실을 나갔다.

 몇 걸음만, 몇 초만. 그렇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울리자마자 반에서 뛰쳐나온 너.

 “이쪽인데.”

 급식실과 우리 반은 완전 다른 방향에 있어서 그는 역시나 반대 반향으로 가려고 했었다. 내가 불러 세우지 않았으면 달려가고도 남았을 것을.

 “신난 얼굴이네.”

 “, 조금?”

 “왜 신났는데?”

 “.. 아까 첫사랑, 아니. 아까 수학시간에 - 첫사랑 얘기더라.”

 

 너를 만나면 꺼낼 첫말을 뭐로 해야 할지 몰라 평상시보다 더 신나 보이는 너의 표정을 주제로 잡았다. 당연히 너무 오랜만에 밥 먹는 게 너무 좋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주제 선정을 잘못한 듯하다.

 첫사랑. 첫사랑이라...

 “...누구였는데?”

 “?”

 “누구였냐고.”

 “누구긴, 수학선생님이지. 저기 계시네.”

 아아, 그래 그랬구나.

 둘이 눈을 마주치고 뭐라 뭐라 대화하는데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지칭하지 않은 듯.

 이미 나도 다 알고 있는 듯.

 

 “ - 또 우리 둘끼리 볼 것 같지만.”

 대화가 끝난 거 같다.

 “정우야, 가자.”

 네가 부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

 기분이 나빠졌다.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고, 잘 모르고 있다고. 상상이 내 마음을 저울질 하고 있다.

 “...”

 “나 선도부 회의 있어, 너 혼자 먹어.”

 있지도 않은 회의를 변명으로 꾸며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얼굴 보면서 웃으며 같이 밥 먹는 거,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이 먼저 행동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분명히 붙잡힐 것이라는 것을.

 “정우야, 회의 공지 안 했잖아. 방송으로 너네 부르지도 않았고. 그리고 오늘은 처리할 일 없..”

 “회의 있다고.”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있지도 않은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사라졌다.

 

 

 

* * *

 

 

 

 점심은 매점에서 사먹는 걸로 하였다. 회의 있다고 거짓말까지 쳤는데 급식실에서 마주치면 큰일 나니까, 동선이 겹치지 않은 선에서.

 생각에 잠겼다. 첫사랑이야기를 내게 한 걸까. 언제부터 첫사랑이었을까. 고등학교 들어와서 부터? 첫사랑, 왜 첫사랑이라고 지칭한 것일까.

 “신경 쓰이게 진짜...”

 그럼 첫사랑은 남겨두고 나보고 좋아한다고 저러는 거야? 좋아만 하니까 좋아한다고 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오만가지 생각이 파편이 되어 머리를 긁어 어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러질 못하겠다. 이제 어떻게 마주보지... 어쩌면 당분간은 만나지 말던가... 아니면 정리를 하던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당연한 거였을까, 그 날 점심을 먹은 후로 학교가 끝날 때까지 마주치지 않았다. 문자도 전화도. 그 무엇도.

 그냥 그렇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였다. 어딘가 허전한 등교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오늘은 기분전환을 해볼 겸 자리를 바꿀 거야.”

 선생님의 한 마디에 교실은 떠들썩해졌다. 기분전환 겸 자리바꾸기라. 별 의미 없는 거 같았다. 자리가 거기서 거기지...

 거기서 거기인거 취소. 넷째 줄은 칠판이 좀 안 보이네.

 어쨌건, 자리를 바꾸고 나서 지금은 점심시간 전 교시였다. 오늘 점심은 또 어떡하지. 매점에서 사먹을까. 종 치기 30분정도 남았네. 또 회의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지, 오기 전에 안 보이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지...

 

 아마 앞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도망갈 용기가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니?”

 활짝 열린 문에 서있는.

 “물리 선생님이 연정우 학생 찾고 계세요.”

 너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물리 선생님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저 말은 분명히...

 “선생님, 저는...”

 “, 저한테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펼쳐보였다. 당당하면 오히려 의심하기 어려운 사람의 심리란, 당황스러움에 가까울지도.

 “...그래, 정우야 가봐라.”

 “....”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있는 문 까지 걸어갔다. 나는 보이지 않을 불편함은 가득 담은 채로.

 

 

 

* * *

 

 

 

 교실에서 나온 뒤, 우리 둘 사이에는 그저 침묵만 흘렀다. 당연히 물리 선생님이 날 불렀다는 건 거짓말이었는지, 나는 너를 따라 복도 끝에 있는 계단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계속 침묵만을 지켰다. 무슨 말을 꺼내야하는지 몰랐고, 어떤 말이 내게 올지 몰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우야.”

 “...”

 계단에 도착해서야 들리는 너의 목소리에 나는 또 답이 없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을 해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거지?

 이 상황은 지금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너 지금 장난해?”

 결국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한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장난일리 없겠지. 그런데 장난 보다 더한 상황인 것을. 거짓말까지 치며. 너는 나를 이곳에.

 “이게 뭐하는 건데.”

 정말 이게 무슨 상황인건지. 나는 너에게 물었다.

 “너가 날 피하잖아.”

 “...”

 너의 말에 나는 정곡이 찔렸다. 피하려던 거 사실이니까. 네 눈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서 그런가. 더 감성에 젖어 들기 전에 네가 말을 꺼냈다.

 “정우야, 너가 날 자꾸 피하잖아. 이러면 너가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너가 자꾸 날 피하는 거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 미안해,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

 잘못한 거...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지? 너는 그저 네 생각을 말한 거고. 그거 때문에 피하려고 했던 건 나고. 그래서 오히려 잘못하고 있는 건 난데?

 “진짜 미안해. 너무 미안한데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 피하지 말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

 “너 잘못한 거 없어.”

 “...?”

 “너 잘못한 거 없다고.”

 “정우야, 그게 무슨...”

 “내가 혼자 너무 짜증이 나서 그랬어.”

 “?”

 아 그래. 나 짜증났구나. 그랬구나.

 이제 나도 몰라. 생각나는 대로 내뱉을 테야.

 “너가 수학 선생님 얘기를 하는데 내가 너무 짜증이 났다고, 그 얘기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둘이 희희덕 거려서 더 화가 났다고. 내가 왜 짜증나게 너 첫사랑 얘기에.. 이래야 하냐고...”

 “아니, 여기서 수학 선생님 얘기가 왜...”

 “너 진짜 장난해? 왜 자꾸 말 꺼내게 해, 너가 그 쌤이 첫사랑이라며. 너가 영화 얘기하길래 내가 첫사랑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그 선생님이라며!”

 

 아, 또 그 때 일 기억나 버렸어.

 나 혼자 자폭해버리고 또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마, 그 다음에 네가 다시 날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다시 너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을 고하는 말을 했었을 지도 모른다.

 

 “정우야, 있잖아..”

 “...”

 “수학 선생님은 내 첫사랑이 아니라 그날 그 영화를 보여줬던 분이야.”

 “...?”

 “너가 누구냐고 물었었잖아, 나는 너가 영화 보여준 사람 누구냐고 묻는 줄 알았어. 근데 우리 정우가... 오해를 한 거 같네?”

 “...”

 

 오해? 내가 오해를 한 거라고...?

 나 혼자 별의별 생각을 하며 나 혼자 마음 접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 오해였다고? 아 잠깐, 잠깐만...

 “정우,”

 “말 하지 마, 너 조용히 해...”

 급격하게 밀려오는 오만가지 감정 때문에 천천히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갈 곳 없는 걸 알면서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결국 뒤에 있던 벽에 등이 닿았다.

 아 제기랄. 얼굴 못 보여줘. 죽어도.

 

 “정우야, 왜 등을 돌려."”

 “...오지 마.”

 “싫어, 정우야.”

 “오지 말라고...”

 

 제길. 오지 말라고 해도 뒤에서 들려오는 저벅거리는 소리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오지 말라 해도 안 올 거라는 것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차라리 죽고 싶은데. 나 혼자 쪽팔리게 생각하던 거 전부 감싸 안고 여기서 자살하고 싶은데. 여긴 왜 창문이 없는 거야... 혀라도 깨물어야 하나...

 나를 보고 싶은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근데 난 보여주기 싫거든. 나는 있는 힘껏 벽에 붙었다. 마치 벽에 일부가 되고 싶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그런데 손길대신 목에 닿은 낯선 간지러움에 놀라 힘이 풀어져버렸다. 내가 풀어지자마자 놓치지 않겠다는 손의 느낌이 날 잡아챘다. 그러자 보이는 그의 얼굴.

 그리고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

 “정우야.”

 “...”

 

 내가 대답이 없자 너는 다른 물음대신 내 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다가 두 손가락으로 내 턱을 올려 시선을 마주치게끔 한 거 같지만 나는 너를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잘한 거 하나 없는데 무슨 배짱으로 어떻게 너를 바라보는가.

 “우리 정우가 혼자 오해를 했네. 그래놓고 나를 피하면 어떡해, ? 선도부 회의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피하던 시야 안에 네가 들어와 더 이상 다른 곳도 못 보게 되었다. 이마가 맞닿아 앞머리의 느낌이 왔다. 코끝이 닿았다.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는 너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계속 생각하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하지만 너가,”

 “쉬이...”

 뭔 말을 하려고 해도 네가 먼저 내 입을 너의 검지로 막아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부끄러워 죽겠는데,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 정우야.. 미안해, 안 미안해?”

 내게서 대답을 듣고 싶은지 잠깐의 여유를 준 그였기에 나는 짧게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미안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마음은 없었다. 내가 오해를 했다는 걸 알고 나자 나도 내 잘못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 잘못을 인정하자 그의 온기가 아랫입술에 맺혔다. 그 감각은 언제나 눈이 자연스레 감기면서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언제나처럼 사고가 정지되어 그저 그가 당기는 대로 움직여버린다. 따뜻함과 상냥함에 지배당하면 숨도 쉴 수가 없다. 뒷머리가 감싸져서 그대로 또 그대로.

 정말 마법 같은 그의 입맞춤은, 키스는. 내게 마약과 같은 달콤함이었다.

 

 “정우, 하아.. 정우야..”

 네가 나를 부른다. 나는 눈을 떠 너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제발 말해줘, 정우야.”

 내가 멋대로 오해하고 만 것인걸, 내 잘못에 네가 더 매달리는 이유를, 알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 정우야. 좋아하는 만큼 걱정이 됐어. 그러니까 제발 앞으로는 말로 해주라. 제발 나 피하지마...”

 나는 너의 말만 멍하니 듣고 있다가 너의 간절함에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의 간절함에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말할지를 몰라 그저 바라보기만.

 “걱정 시켰으니까 내 소원 들어줘야 돼.”

 “...어떤...”

 “종 칠 때까지 나랑 있어.”

 어차피 두고 갈 생각도 없었어.

 

 잠시 떨어졌던 입술은 5분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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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오님.... 저는 이제 죽으면 될거 같습니다...키히힣.... 연성이 너무 늦었네요.... 저번주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주에 또 개강이라...((사망))

감히 뭐라 할말이 없...없....(((((자살))))

글도 참....(((((죽자)))))))

쓸거 참 많은데 하하하하하하ㅏ하하하하하ㅏ하하핳하 늦어서 죄..죄...((죽음으로 사죄하자))

쿨쩍....앤오님제가마니조아해요....///하투

[1차] 여장 - 2. 바람




 "크...크...크크...크크크크크..."
 "......"
 "프흐...프흐흣...푸하하하하핫-!!!"
 "...조용히좀 웃어라 제발."
 내 앞에서 미친년처럼 웃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촌 임청아다. 아주 배를 잡고 미친듯이 웃고 있는 이유는.
 "그...그치만... 프흐... 연정우가... 크흐흐... 여장...푸하하하하하하핫-!!!"
 원래 안 말하려고 했는데 요즘 인터넷과 sns가 이리도 잘 발달해 있는 시대여서 벌써 우리학교 축제 영상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안 말해도 이미 다 들킨걸 어떡해.
 "하아-... 최고다 연정우. 어떻게 여장할 생각을 했지?"
 "하고 싶어서 한거 아냐. 떠밀려서 한거지."
 "그래그래, 그래서 일등먹었어?"
 "인정하긴 싫지만 먹었다, 일등."
 "크으-, 역시 우리 아우. 어렸을 때 그렇게 예쁘장하더니 이렇게 멋지게 커서 여장이나 하고.  일등먹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사내대장부던 임청아는 어디 남장대회 안 나가나."
 "시끄러워요 우리 아우?"
 오늘 그녀를 만난 이유는 그녀가 날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고자 물었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는?"
 "아, 그게. 사실 부탁이 있어서."
 "무슨 부탁."
 "실은..."



*   *   *



 "너 오늘 내 동생해라."
 "......"
 "오늘 하루만 임정아해라. 어때."
 "어때고 나발이고..."
 내가 다시는 안하겠다는 여장을 왜 또 해야하는가. 내가 뭘 그리도 잘 못하여 이리 또 여장을 해야하는가. 나는 왜 그것을 허락했는가.
 "잘 어울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며 엄지를 들어올려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내게 소원을 썼다. 전에 빚진게 있어서 소원하나 들어주겠노라 약속했었거늘, 그게 설마 여장이 될줄은 상상이나 했겠나. 차라리 기한이라도 정해놨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을. 한 번 말로 뱉은 약속은 모두 책임지겠다는 내 안의 규칙이 처음으로 한스러워졌다.
 그래도 가발이며 화장이며 옷이며, 축제 때 했던 여장보다 훨씬 여성스러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 맞는 큰 옷이 있을 수 있는건데..."
 "그거야 빅사이즈 옷이 유행할 때 한창 사놓은거라 그렇지~"
 키는 크지만 몸매가 듬직하지 못해서 그런지 그녀의 왠만한 큰 옷은 거의 다 맞아 들어갔다. 그래서 오늘 입은 패션은 긴 치마에 얇은 나시를 입고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멋드러진 챙모자를 쓴 긴 머리 여성이라 해야하나.

 "그래서 이제 뭐 어쩌라고...?"
 "케이크가게 가는 것!"
 "......"
 "마스크는 허용해줄게. 목소리가 여자가 아니네."
 "......"
  마스크라도 허용되서 다행이다. 아무리 못 알아볼 정도라해도 알아볼 사람은 다 알아보기에 얼굴은 가리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필~ 여자끼리 가면 50%할인해주는 가게를 발견해서~"
 "커플은 완전 할인해주겠네."
 "아니~ 남녀끼리가면 22%할인."
 "......"
 "그래서 여장한거라구~ 알겠어 동생아?"
 "...모르겠다. 그나저나 친구랑 같이 가면 되잖아."
 "바쁘데~"
 "......"
 친구가 없는 건 아니고? 라고 말하려던게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말았다. 이 고집쟁이를 대체 누가 말리나.

 그렇게 그녀와 케이크가게를 가고 있었다. 케이크에 그렇게 신났는지 그녀는 나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툭-,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에 뭔가 싶어 뒤돌아보니...
 "저기..."
 어라.
 "이거 떨어뜨리셨...는 데요..."
 내가 실수로 떨어뜨린 무언가를 주어준 사람은.
 "......"
 나를 한 순간에 어버버거리게 할 수 있는 존재.
 "그쪽 거 아니신가요...?"
 그는 내 애인, 김진우였다.

 "우와~ 손수건 주워주신 거에요? 감사해라~"
 내가 어버버거리느라 자기 뒤에 없는 걸 알았는지 그녀가 내게로 갑자기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아야, 주워주셨잖아. '목 아프니까' 말은 말고 어서 받아."
 나는 그녀의 말에 묵묵히 그가 주워준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언제 들어있었는지도 모를 손수건이었다.
 "제 동생이 지금 목감기에 걸린 상태라서 말을 하면 더 안 좋아진다나봐요. 무례해보여서 죄송해요~"
 생글생글 웃으며 얘기할 그녀 얼굴에 침뱉기는 아마 누구도 못할테지. 난 일부러 챙모자를 눈을 가릴만큼 내려쓰고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어차피 그는 나보다 키가 크니,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내 눈이 보이진 않을 것이다.
 "...동생분이 키가 크네요."
 "유전자 결함이겠죠~ 이래봬도 닮은 구석 많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테니 그쪽 멋진 남성분도 가실길 잘 가세요~ 임정아 가자!"
 그녀가 급하게 내 손을 잡고 갈 방향을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가 그곳에서 멀어졌다고 느껴졌을 때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아는 사람이야?"
 "어...?
 "아까 그 남자."
 "...응. 같은 학교 다니는..."
 최소한의 거짓말은 안하는 선에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가 다 알겠다는 듯 끄덕거린다.
 "아 역시나. 왠지 가만히 있더라... 나 안갔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와줘서 고마워."
 도움을 받은건 사실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필수다. 얘 안왔으면 다신 안한다는 여장 들킬뻔 했으니...
 "고마우면 케이크."
 고마움 취소다.



*   *   *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여장을 전부 풀어 헤치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또 가자!"
 "안 가."
 단호하게 말하자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는데, 금방 정신차리고 하는 말이.
 "22%할인도 괜찮으니까~"
 내가 또 가나 봐라. 이미 빚은 다 갚았으니 잃을 것도 없다.
 "어쨌든, 즐거웠어 내 동생~"
 "누가 동생이래."
 "우리 정아!"
 "입 다물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는 이만 헤어지자는 소리에 손을 설래설래 흔들고는 돌아갔다. 이제 나는 연정우이다.

 돌아가자 마자 그의 안김을 받고 말았다.
 "정우야..."
 애달프게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그를 다독거렸다.
 "왜, 무슨 일이야..."
 "오늘 낮에 있던 일이야..."
 그가 나를 데리고 앉히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산책을 나갔다가 왠 아리따운 여성분이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걸 보고 말았지."
 저거 백퍼센트 나다.
 "그래서...?"
 "그래서 친절하게 주워드렸지. 그 순간 얼굴을 본 거야."
 "......"
 온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이름도 예뻤어. 그의 언니가 방해만 안 왔더라면 더 이야기 나눴을텐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몰라서 묻는거야?"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 나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와 대면해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시선 피하는 것뿐이라니.
 "예뻤다고."
 "......"
 "정우야, 응? 나 바라봐 줘."
 그의 말에 피했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왜 나한테만 안 보여주는거야?"
 "...알아챘네."
 "왜 못 알아보겠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인데. 다가려도 투시가 되서 보이는걸."
 "...오늘은 걔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니'?"
 "...정확히는 내가 생일이 빠르긴 한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그 '언니'는 어떤 관계인데."
 "사촌지간..."
 "아, 가족이 될 분이었구나."
 "......"
 "그래서, 나한테만 언제 보여줄거야?"
 
 첫번째는 뽀뽀로 넘어갔지만 두번째는 그걸로 부족하다며 절대로 여장을 봐야겠다고 말뚝박아 버렸다. 싫다고하자 남에겐 보여주고 자기 한테만 안 보여준다고 실망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이상 싫다고 하나. 다만 이번엔 꼭 자신만 봐야겠다며, 남들에게 보여지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고 자신이 보고 싶을 때까지 아껴둘거라고 그런다.
 처음부터 하지 말걸,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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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왜 3편 제작이니? 원래 2편만 쓰고 말라켔는데.../ 3편은 앤오님 도움이 필요해요..!!
[1차] 여장 - 1. 축제





 "정우야 한 번만 부탁할게."
 "......"
 "우리들 처음하는 부탁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제발..."
 선도부 학생들이 나에게 이렇게 애걸복걸하고 있는데도 내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내게 부탁하는 것이 바로 축제에서 열리는 '여장 콘테스트'에 출전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원이 나가도 되잖아..."
 "하지만 네가 아니면 임팩트가 없다니까!!!"
 "......"
 미간이 절로 짚어지는 이 상황의 또 다른 이유는 상금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학교측 본 목적은 동아리 홍보였다. 물론 동아리 발표대회같은게 따로 있긴 하지만, 그저 단순한 재미를 위해 동아리 홍보라고 예쁘게 포장해놓고는 각 동아리에서 남자 한명을 골라 여장을 시키고 출전시키는 이벤트인것이다. 이 바보같은 이벤트에 출전하는 동아리 팀이 처음에는 많지 않아서 동아리 운영비랍시고 상금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 상금을 타기 위해 처음보단 참여하는 동아리가 많아졌다나 뭐라나.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네가 나가면 상금은 우리거라니까?"
 "우리가 상금타서 뭐하게."
 "회식!"
 "......"
 사실 선도부는 따지고보면 동아리가 아니라서 콘테스트이 참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데도 동아리이름을 걸 수 있는 이유는 콘테스트의 새로운 규칙이 생겼기 때문이다. 동아리만들때 조건인 최소 인원 다섯명이 한 그룹이 되어 일일 동아리가 되면 출전할 수 있다는 것. 다만 특정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지 않거나 콘테스트에 출전하지 않는 동아리 가입부원 남자만 일일 동아리가 될 수 있다. 원래 동아리 홍보가 목적이기에 콘테스트에 나가면 가명소개와 짧은 동아리 소개 그리고 어필로 나뉘는데, 그런 일일 동아리는 그냥 재미로 동아리 소개를 한다더라. 그렇게 한다면 한 층 더 즐거운 축제가 된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래서 선도부도 그런식으로 참여하자는데 하필 지목대상이 내가 된 것이다. 가장 안 그럴거 같은 사람이 그러면 인기 폭발이라고 얘기하는데 안 그렇다는건 대체 뭐가 안 그런건데.
 "연정우가 콘테스트 나간다고?"
 "아, 부장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저 안 나가요."
 "왜 안 나가는데? 가서 선도부의 위엄을 보여주고 오지 그래."
 "...선생님도 상금이 목적이신가요."
 "안 그래도 고3들 졸업하기 전에 한 번 회식하고 싶었어. 부족한 돈은 선생님이 채워줄테니, 어때?"
 "아직 수능도 안 끝났는데..."
 "하루정도 스트레스 푸는건 괜찮다."
 "상금 못 타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과자파티로 때워야지."
 "......"
 그냥 귀가부나 할걸. 이걸 이제와서 후회하면 어쩐단 말인가.
 "...상금 못 타도 내 책임 아니라고 약속해."
 "아? ...정말...?"
 "부장선생님이 떠밀어서 억지로 나가는 거라는 전제 깔고 상금 못 타와도 책임은 부장선생님께 있는 거라고 약속하면 하던지 말던지 할게."
 "계약 성립."
 "...좋아."
 그렇게 나는 여장 콘테스트에 참여하게 되고 말았다.



*   *   *



 때는 화수고 축제, 콘테스트 전 장기자랑을 하는 중.
 "......"
 화장을 받고 가발을 쓰고 옷은 선도부 답게 교복으로 했는데 밑에는 치마인, 나의 여장이 완성되었다.
 "미쳤다 연정우. 너 누나있냐?"
 "어쩌면 정석형이 아니라 정석누나일지도 몰라."
 "...제발 그 입들 좀 다물어..."
 "아아- 정우 정말 예뻐서 그래. 차라리 여자로 태어나지 그랬어."
 "......"
 항상 쓰고 다니던 안경을 벗고 있으니 어색하고 이상했다. 밑은 훤하지 구겨넣은 가슴살은 답답하지. 게다가 연습 중인 대사는 말하고 나면 죽어버릴 거 같았다.
 "정우야 대사 다 외웠지? 한번 해봐."
 "...'안녕, 나는 화수고 3학년 선도부 소속 연정아야. 우리 선도부는 학교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어. 학교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에겐 엄벌을, 학교를 사랑하는 자에겐 칭찬을. 여러분은 선도부 연정아에게 투표를. 내가 보여줄 어필은 애교려나 찡긋.'"
 "잠깐 잠깐, 너무 국어책 읽잖아! 게다가 맨 마지막 찡긋은 왜 읽는건데."
 "써 있길래 다 외웠지."
 "다 외운건 좋은데 나가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 알지?"
 "...어쩌라고..."
 "최선을 다하란 말이다!!!"
 "......"
 최선, 최선이라. 그래 최선은 다해야겠지. 아 그냥 귀가부나 할걸.

 "여장 콘테스트 참여하실 분들 무대위로 올라와 주세요."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마냥 비장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들려오는 응원소리는 최대한 무시하고, 최선을 다해보고자 나는 무대 위에 섰다.



*   *   *



 무대가 끝났다. 우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 돼도 않는 애교와 아양을 부리니 죽을것 같았다. 계속 웃어대느라 안면근육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냥 죽자. 회식이고 뭐고 죽음이 답이다.
 "이번 축제에서 여장 콘테스트 1등은..."
 결과고 뭐고 죽고 싶다.
 "예상외의 귀여움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녹인 선도부 연정아! 축하합니다!"
 죽자.

 간신히 죽지 않고 상금을 받아 그날 저녁에 선도부는 단체 회식이 있었다. 부원들은 수고했다며 나만 챙기더라. 물론 나는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
 "왜 나한테 안 말했어..."
 "굳이 말해야하나 싶어서."
 여장 콘테스트나가는 것을 애인에게 비밀로 한 것이 문제였다. 근데 비밀이라기 보단 안 말한게 정확한 표현법인데. 일부러 안 말한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시간이 안되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 뿐인데... 역시 서운하려나...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마음에 안들때 짓는 표정이었다. 하긴,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나한테만 보여주겠다고 했잖아... 근데 왜 전교생 앞에서..."
 "이건 그거랑 다르잖아."
 "다른 거 하나도 없거든. 말도 없이 여장하고 말도 없이 애교부리고..."
 "나도 다시는 하기 싫어."
 내가 일부러 시선 피하며 이야기하는데 그게 또 싫었는지 내 볼을 감싸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선 손이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나의 시선이 그의 시선 끝에 닿았다.
 "나만 보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제 이마에 맞대어 부빗거린다. 앞머리 쓸리는 사락사락 들려온다.
 "나만 보고 싶었다고 정우야..."
 "...미안해, 너만 보여줬어야 했는데."
 나는 그가 올린 손에 손을 겹치며 사과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이 다였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는 내게 씨익 웃어보이며.
 "그럼 내 앞에서 여장 한번 더하자."
 간만에 벌점이나 먹일까.

 결국 손뽀뽀, 뺨뽀뽀, 입술뽀뽀로 어찌저찌 넘어갔는데,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그땐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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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연성 중 하나는 여장이었답니다(찡긋)이쁜 앤캐님 캐붕내는거 제가 제일 잘함((그게아님 그냥 글을 못쓰는거)) 2편도 있어요^p^... 멋대로 연성한거 용서해주신다면 2편 보여드려야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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