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정우/대학생] 감정

 

 

 

 "그거 들었어?"

 "어떤 거?"

 "학교 앞에 카페 있잖아. 거기 새 알바가 왔다는 거!"

 "그래?"

 "가볼까? 그 알바생 무지 잘생겼데!"

 소란스럽다. 강의 시간이 아니면 소란스러움은 진정되지 않은 거 같다. 특히 교양시간은 사람이 더 모여서 더욱... 머리가 아파지면 조용한 곳에 가면 된다. 다음 강의 전까지 시간이 남으니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려고 할 때 쯤 전화가 왔다.

 "연정우!"

 "...뭐야 임청아 왜."

 "톡으로 선물 보냈으니까 즐기고 와!"

 "선물? 뭔 선물."

 "무려 너희 학교 앞에 있는 카페 새 알바생이 잘 생겼다는 제보라고! 그 카페 기프티콘 보냈으니까 알바생 얼굴 좀 보고 와줘~"

 알바생? 뭔 알바생을.. , 그러고 보니 아까 있었던 소란스러움 중에 그런 말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생각을 되짚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벌써 SNS에 다 떴단 말야. 내가 가기엔 조금 머니까 부탁할게! 그럼 나 다음 강의 들어간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전화종료 화면을 바꾸고 선물 줬다는 사촌의 말을 확인해보았다.

 "핫초코랑 초코케이크 기프티콘."

 사촌의 취향이 꾹꾹 담긴 메뉴였지만 만인이 거부안 할 디저트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를 가더라도 소란스러움이 사그라지진 않을 텐데. 그럼 지금은 도서관을 가고 집에 갈 때 쯤 한 번 들리는 건 괜찮겠지. 이왕 선물 받은 것이니 거부할 이유는 없고, 잠깐 그 카페에 들려서 빠르게 포장해서 가도 괜찮을 거 같고...

 

 "월요일도 아닌데 도서관 휴관이라니..."

 가벼웠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생각하다가 기프티콘이 생각났다. 카페... 백색소음으로 오히려 공부가 잘 된다고도 들은 거 같은데.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무거워진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딸랑- 학교 앞에 있는 카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어서 오세요-"

 인사로 시작하는 카운터에는 여자 분이 계셨다. 분명 새로 온 알바생이 잘 생겼다고 했는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가 이 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주문을 시작했다.

 "핫초코 한 잔과 초코케이크 주문 받았습니다. 진동벨 울리면 가지러 와주세요."

 카페를 둘러보아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이랑 간간히 부딪히는 찻잔 소리.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만큼이나 크지 않은 이야기소리. 이 정도를 백색 소음이라고 할까. 도서관보다는 아니지만 책 읽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지이이잉- 책보다가 울린 진동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부스로 갔다. 그곳에서 핫초코와 초코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봤는데, 그 쟁반 위에 마카롱 몇 개가 더 올려 져있었다. , 이건 안 시켰는데?

 "저기, 주문 잘못 받으신 거 같은데..."

 ", 그거 서비스에요."

 서비스라고 말해주는 목소리는 카운터에 있던 여자 분의 목소리와 달리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말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눈이 마주치는 곳에 익숙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가 서있었다.

 "손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주는 나의 서비스."

 

 "얼마나 있다가 갈 거야?"

 "... 다음 강의가 한 시간 뒤에 있으니까 그 전까진 있을 거 같아."

 "그래? 그럼 30분 뒤에 네 자리로 갈게. 지금은, 갑자기 주문이 많이 들어와 버려서...!"

 ". 천천히 하고 와."

 아까 주문할 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그럼 그 사이에 온 건가? 만약 그 사이에 왔다면 내가 못 봤을 게 분명하다. 책 읽고 있었을 뿐더러 출입구와 등지고 앉았었으니까. 나는 케이크를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부터 일 한 거지? 전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며 준비 중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알바였을까? 그럼 그거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건가?

 "정우야, 오래 기다렸어?"

 "? ... 왔어?"

 ". 너무 보고 싶어서 주문 받은 거 빨리 끝내고 왔지. 조금 이따가 다시 가야할 거 같지만-"

 네가 내 맞은편에 앉음과 동시에 내 모든 생각이 중단되었다. 계속 생각하는 것보다 너에게 듣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여기 언제부터 일 한 거야?"

 "일 한지는 별로 안 됐어. 아직 배우는 중이라."

 "그래? 그럼 뭐 준비한다고 한 게 알바였어?"

 ", . 알바는 맞긴 한데, 바리스타를 해보고 싶었거든."

 너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바리스타...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전문직. 그것도 너에겐 분명 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정우 놀래켜 주고 싶었단 말이야."

 "뭘 놀래켜 주려고."

 "내가 이 카페에 와서 일하려고 고생 좀 했거든. 왜 이 카페로 왔는지 알아?"

 "?"

 "정우가 다니는 대학교랑 가깝잖아. 여기서 널 기다리고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생글생글 웃는 너의 모습을 바라봤다.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못해서 전보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건 맞지. 그런 이유로 이곳에 와서 나를 보며 웃는 건 조금...

 "정우야."

 "...?"

 "마음껏 공부하고 와도 돼. 나 야간타임 있어서 늦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와. 알았지?"

 "... 그럴게."

 조금... 조금 많이 설렌다.

 

 "그런데 카페엔 왜 왔어? 원래 비어있는 시간엔 도서관가지 않아?"

 "... 오늘 도서관 휴관이더라고. 마침 이 카페 기프티콘을 받게 되어서 온 거 뿐이야."

 "그래? 나 사실 아까 들어오면서 너 봤을 때 많이 놀랐어. 여기에 올 리가 없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나 했지."

 "헛것일리가..."

 ", 진동벨로 확인하기 전까지 정말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볼 수 있고 너무 좋다."

 "... 나도 좋아.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여기 새로 들어왔다는 알바생이 누군지 알아?"

 "알바생? 최근에 들어온 사람은 나뿐인데?"

 "그래? ...소문이 틀린 건 없네."

 "소문? 어떤 소문?"

 "새로 온 알바생이 잘생겼데."

 "?"

 "강의 끝나고 나면 그 얘기로 소란스러워. 기프티콘 준 애도 그 소문 확인해달라고 준 거였거든. 소문은 맞다고 얘기 해줘야겠어."

 "그런 소문이 돌았다고?"

 "몰랐어?"

 ", 난 정우한테 커피 만들어 줄 생각만 했거든. 그러고 보니 여학생들이 더 많아졌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난 잘 모르겠어서."

 "그렇구나... 일 그만둘 생각은 없지?"

 ", 당장은 그만둘 생각 없어. 난 여기가 가장 좋아. 정우도 이렇게 볼 수 있고."

 ", 그건 나도 좋아. 좋은데..."

 "좋은데?"

 "... , 나 강의 시간 다 됐다. 가볼게."

 "? , .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 끝나면 여기로 와."

 "...그럴게."

 너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가야했다. , 생각났을 때 문자해줘야지.

 「 그 카페 알바생 잘생겼더라. 그런데 가지는 마.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거든.

 이 문자를 모든 여대생들에게 보내주고 싶다.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니까 눈독 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카페에 갈 손님들이 조금은 줄어들까. 그러면 나도 카페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

 

 강의가 끝난 뒤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폈다. 역시 카페보다 조용한 공간이라 생각하던 차에 문자가 왔다. 아마도 강의 전에 보낸 문자의 답이겠지.

 「 이미 임자 있다니! 아 역시... 잘생긴 남자들은 이미 짝이 있나봐!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면전에 대고 물어봤어? 아니면 아는 사람이야?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애인이거든.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답장은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답 안하면 분명 뭐라 하겠지만, 답해서 귀찮은 거나 답 안 해서 귀찮은 건 똑같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귀찮게 또 문자가 왔다.

 「 뭐야! 답을 안 하다니. 그렇다면 선택지에 없다는 말이잖아? ~ 선택지에는 없는데 임자 있는 건 안다? 답은 하나네~ 모르는 사람이지만 임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완전 틀렸거든.

 「 아 잠깐 잠깐. 모르는 사람인데 갑자기 그걸 말할 리가 없잖아. 연정우가 모르는 사람한테 고백했을 리는 없고... 그럼 그 사람이 '나 애인 있어요.'라고 팻말이라도 들고 다니나?!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 팻말을 들고 다니면 SNS에 그게 안 뜰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묻는 걸 들었어? 엿들었어?

 「 아니. 그런 걸 누가 물어.

 「 ? 잘생겼다며. 여자들이 가만히 안 놔둘 텐데? 애인 있냐 번호는 뭐냐 묻는 사람이 하루에 한 두 명은 꼭 있을 걸? 내 초콜릿을 걸게!

 뭐? 뭘 묻는다고?

 「 그나저나 내가 문자 5개 보낼 때 연정우 답장이 하나왔다니! 평소에는 씹으면 계속 씹을 텐데, 하나라도 보낸 거 보니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 걸~ 혹시 그 사람이, 그 질문을 받는 거에 네가 신경 쓰인다면 얼른 가서 지켜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임청아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 편인데...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누가 묻는다면... 친절하게 성실히 대답할 네 모습이 싫은 게 아니다. 그냥 누가 묻는 거 자체가 싫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가방을 챙겨들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여대생들이. 정신없다. 아까보다 훨씬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거 같은데 그냥 다시 돌아갈까...

 "나보러 왔어?"

 "?"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금세 카운터 앞으로 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의 물음에 눈을 마주쳤다. 아까는 여자 분이 서있었더니 지금 서있는 사람은.

 "나 오늘 일생동안 쓸 행운 다 쓰는 거 아니지?"

 "진우..."

 "? , 주문받아야지. 우리 정우는 뭐 마실래?"

 "...나 그냥 아메리카노."

 "그래? 라떼도 맛있는데. 나중에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너는 내게 함박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진동벨을 주며 좀 이따 갈 테니 앉아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작게 끄덕이고는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운터에서 그리 멀지 않아 네가 잘 보이는 곳에. 개인 독서대를 놓고 노트북도 열어서 시선이 최대한 정면에 닿도록 하였다.

 "... ...?"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곳에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턱을 괴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누가 너에게 뭔갈 묻는 건 정말 싫을 거 같은데, 내가 그걸 들어서 어떡할 거지. 누가 애인 있냐고 물으면 내가 가서 그 애인이 전데요, 라고 할 건가. 절레절레-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왜 여기에 온 거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진동벨 안 울렸는데?"

 "내가 먼저 가져왔지."

 "...근데 서빙은 원래 안 되지 않아?"

 "너에게 오는 김에 같이 가져온 거야. 휴식 시간도 받아오고 케이크도 가져왔어. 같이 먹자."

 "그래..."

 펼쳐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잠시 접어두고 널 마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오라고 했지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어. 이 시간은 사람 진짜 많거든. 그래서 이 시간에 볼 줄 몰랐는데, 정말 나 보러 온 거 아냐?"

 ". 너 보러 왔어."

 "?"

 네 눈이 빠르게 깜빡거린다. 물음에 대답한 거뿐인데 저렇게 놀랄 일인가?

 "너 보러 온 거 맞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럼 여기서 공부하려고?"

 ". 그러려고."

 아메리카노를 들어 한 입 마셨다. 뜨거웠다. 조금 식히고 마셔야겠네.

 

 "정우야."

 "."

 "나보러 온 건 정말 기쁜데, 너 공부까지 방해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늦게 와도 괜찮아."

 "그래? 그럼 가볼게."

 "...? 이렇게 빨리?"

 "괜찮다며."

 "...찮은데. 지금은 안 괜찮아. 나보러 왔다며. 조금 더 보고가."

 가방을 집으려던 내 손 끝에 네 손이 닿았다. 가지 말라며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반짝이는 거처럼 보였다.

 "그래. 너 퇴근할 때까지 있을 거니까."

 ". ... 나 휴식시간 끝났다. 공부하고 있어-"

 네가 내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살짝 손 흔들어 주고 시선을 다시 노트북으로 옮겼다. 아메리카노는 조금 식었을까.

 "주문 받겠습니다."

 아까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소란스러움이 많이 잦아들었다. 덕분에 카운터에 서있는 네 목소리가 훨씬 잘 들려왔다.

 "진우야? 안녕! 여기서 일한다고 듣긴 했는데, 학교 말고 이렇게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 안녕. 뭐 마시려고 왔어?"

 "나 딸기 쉐이크랑 치즈 케이크 부탁할게."

 "네네, 주문 받았습니다."

 "근데 진우야."

 "?"

 "너 여자 소개 받을 생각 없어?"

 "없어."

 ", 그러지 말고~ 다른 과에 내 친구 있는데 완전 과여신 소리 듣는다니까? 근데 네가 여기에서 일하는 거 SNS에 뜬 거보고 되게 관심 있다고 했단 말이야. 한 번만 만나봐~ ?"

 "손님, 생각 없다는 사람 그만 설득하시고 여기 알람 울리면 주문하신 거나 받으러 오... 정우야?"

 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고작 한다는 게 저런 말을 듣기 싫어서 도망 나온 게 전부잖아.

 

 카페에서 도망치듯 나와 걷다보니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 내 가방. 가방까지 모두 정리해서 나올 여유가 없었다. 좀 이따... 조금 걷고 후에 진정되면 다시 들어가자. 그럼 될 거다. 그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우야...!"

 들릴 리 없을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살짝 돌아보니 언제 따라온 건지 네 모습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내게 다가온 너에 의해 내 발은 바닥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

 "갑자기 나가니까 걱정되잖아."

 "이렇게 막 나와도 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 그건 중요해. 네가 선택한 네 일이잖아."

 "정우야... 내 일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지만, 난 너를 언제든 선택할 수 없어. 난 그 어느 순간도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

 "일하고 있지만 네가 와줘서 기뻤어. 일하는 중간 중간에 널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근데 갑자기 그렇게 나가니까 너무 걱정되어서... 괜찮아?"

 "...미안."

 고개를 떨군 채 작게 사과를 하자 너는 그 두 팔로 내 몸을 천천히 감싸 안아주었다.

 "정우가 사과할 일 없어. 오히려 내가 해야지. 미안해... 널 안 괜찮게 만들어서... 아까 대화 들은 거지?"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힌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너는 내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걔는 그냥 같은 과 동기일 뿐이야. 저런 식으로 주선하려고 말 붙이고 다녀서 나도 피하려고 해. 아까는 운이 좀 나빴어."

 "...진우야."

 "?"

 "... 일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여자 소개 받겠냐는 말? 나한테는 정우뿐인데?"

 "아니... 그런 말 많이 듣냐고."

 "많이는 아닌데, 가끔 듣긴 해. 근데 나 정말 다 무시하고 있어. 나한텐 너뿐이거든."

 네 말이 진심인 것도 안다. 네 말에 거짓이 없음도 안다.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네가 어떻게 그것을 거부할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내려졌다. 다 알고 있으면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마음이 그걸 원치 않았다.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

 "?"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서 왔었어. 근데 막상 그런 말 듣는 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 안 듣겠다고 뛰쳐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되게 한심하더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는데 난 여전히 네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넌 내 말을 듣고 한참을 토닥거려주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채로 토닥임을 한참 동안 받은 후였나, 네가 나를 불렀다.

 "정우야."

 "...."

 "카페에 가방도 두고 나왔었지? 일단 돌아가자."

 "..."

 네가 손을 꼭 잡고 돌아가는 내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페에 돌아와 보니 그 여자 분도 없었고 카페의 소란스러움도 아까보다 많이 잦아들어있었다. 나는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정우야 갈 거야?"

 "있어봤자 득 될 게 없을 거 같아."

 "왜 없어? 나 있잖아."

 너는 분명 나의 득이지만, 장소도 그렇고 너에게 붙을 질 나쁜 손님도 그렇고 내게 득 될 것은 변변치 않았다.

 "... 그래도 다녀올게."

 "어디로 갈 거야?"

 "도서관 가려고. 두 시간 정도는 더..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럼 나올 때 연락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이 상황을 얼버무릴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모르겠다. 언제 꺼내든 어색해질 거 같아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버렸다. 또 내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움직일까봐. 그러기 전에 이성을 먼저 잡아두는 쪽이 나았다.

 도서관에 가자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아직 시험기간이 아니라서 자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생각을 안 하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공식을 가지고 응용문제를 33개쯤 만들고 별자리를 이루는 별을 67개쯤 외우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래는 이렇게 공부 안 하는데... 사색에 빠질 틈 없이 계속 머리를 써야만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비워진 머리로 너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자리를 정리하고 그곳을 나와 카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감시간이 다 된 카페는 밖에서 봐도 한가해보였다. 밖에서 기다릴지 안에서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안에 있던 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도 살짝 손을 흔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발견 당했는데 밖에 있으면 네가 걱정할까봐.

 "정우야 왔어?"

 ". 카페도 마감 인가봐."

 "10시까지니까. 이제 마무리해야해. 이것만 설거지하면 되니까 조금만 앉아있어."

 비어있는 자리에 아무데나 앉았다. 지금은 어느 곳에 앉아도 상관없겠지. 조용하고 한가하고, 지금은 둘이 있기 딱 좋으니까.

 "다 됐다. 정우야 이제 가자."

 "."

 너와 카페를 나와서 같이 밤길을 걸었다. 밤 산책이 아닌 함께 걷는 하굣길. 생각보다 좋은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내가 나간 뒤로 그런 질문 받았어?"

 "아니? 전혀. 그거 신경 쓰였어?"

 "...신경 안 쓰려고 노력했어."

 "공부 열심히 했나보다. 난 정우가 내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안 하진 않아."

 "무슨 생각 하는데?"

 "알바 하는데 공부에 지장은 없을까..."

 "없어! 전혀! 나도 공강 날짜에 맞춰서 조정하고 일하는 거니까!"

 "그건 다행이네."

 "다른 건? 다른 건 생각 안 해?"

 "다른 건... 글쎄. 오늘 내내 그 질문 들었나 생각밖에 안 해본 거 같아."

 "그거 말인데."

 "?"

 "신경 쓰였다고 했잖아."

 "... ."

 "네가 신경 쓰인 이유가 혹시 질투가 아닐까?"

 "...?"

 "정우가 질투하는 건가 생각했었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조금 놀랐지만, 정우가 내 생각 많이 해주는 거 같아서 기뻤거든."

 "..."

 "그런데 정말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난 정말 정우뿐이거든!"

 "..."

 "나 못 믿어?"

 대답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네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이렇게나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네 말대로 이건 질투의 감정일까.

 내 감정조차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할 때 네가 내 손을 잡아왔다. 따뜻한 온기가 닿자 손을 잡아준 너를 바라보았다.

 "그치? 나는 정말 정우뿐인걸."

 "... 믿고 있어."

 "다음부터 그런 질문 받으면 확실히 애인 있다고 말할 거야."

 "...그것도 좋고."

 "그러니까 카페에 자주와."

 "그건 생각해볼게."

 "저녁시간 말고! 9시쯤에서 마감시간 전까지면 사람도 적단 말이야."

 "..."

 "자주 올 거지?"

 "...그럴게. 시험기간만 제외하고."

 ". 그거면 충분해."

 네가 내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그 어루만짐이 느리고도 조심스러워서 애정이 담겼다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 정우야."

 그 순간 무언가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공부한 지 일주일이 지날 때 쯤 나한테 전화가 한 통 왔다.

 "연정우!"

 "왜 임청아."

 "그 카페 알바생 말야. 요즘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더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SNS에 떴었으니까, 이래볼까 저래볼까 글 올라온단 말이야? 근데 거기 댓글로 그 알바생이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분명 너랑 관련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

 "맞아. 내 애인이거든."

 "애인이었어?! 왜 나한테 안 말했어??"

 "너한테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서."

 "내가 기프티콘도 줬는데...!"

 ". 잘 먹었어. 또 먹고 싶어."

 "말이 그거뿐이야?!"

 "할 말이 더 있어?"

 "아니. 사실 없어."

 "그럼 끊어도 되지? 나 카페가야 해."

 "그래? 음~ 그래~ 나중에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카페에 들어섰다. 문을 열 때마다 딸랑- 거리며 울리는 종소리가 이젠 익숙하고 반갑기만 했다.

 "정우 왔어?"

 네가 반기는 그 목소리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은 뭐 마실래?"

 "네가 주고 싶은 거."

 "내가 주고 싶은 거? 십첩 밥상?"

 "...여기서 가능해?"

 "케이크 열 개는 가능할 거 같아."

 "...아냐. 라떼 마실게."

 "그래. 내가 예쁘게 아트해서 줄게."

 자리에 앉고 봐야할 논문을 찾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을 문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을 잠시 문서에서 뗄 때마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우연인가 했지만, 우연일리가.

 '일 해.'

 노트북을 살짝 내려 너만 보이게 속삭였다. 그러자 너는 내게 방긋 웃어 보인 뒤 시선을 밑으로 향하게 했다. 내가 일하라고 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아마 내가 논문을 다시 보면 또 어느 순간 눈이 맞겠지.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우연이 아니라 네가 나만 바라보기 때문인 걸 안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하라고 말해도 한 눈 팔 걸 알면서도 내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네가 나를 봐서 좋은 걸 알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도 좋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 일에도 네 일에도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선 내가 방향을 바꾸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겨 앉고 다시 노트북을 열자마자 지이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왜 돌려 앉았어?"

 "일하라고 했잖아."

 "일했잖아!"

 "일했어?"

 "했어! 정우꺼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트모양이네. , 고마워."

 "다른 말은?"

 "라떼 아트 예쁘다."

 "다른 말은?"

 "...오늘은 질문 받았어?"

 "그거 묻는 거야? 질문을 받긴 했는데 애인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

 "소문을 듣긴 했는데, 직접 들으니까 훨씬 낫네."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야?"

 "원하지 않는데도 말해주는 정보통이 있거든."

 "그렇구나. 근데 다른 할 말 없어?"

 "일 열심히 해. 나 계속 저 자리에 앉아있을 거니까."

 "손님도 없어서 조금 한가해도 되는데... 난 정우 보고 싶은데..."

 "손님 몰려오면 어쩌려고. 어제도 한 눈 팔다가 갑자기 손님이 10명이나 들어왔잖아."

 "그랬지... 괜찮아. 정우는 뒷통수도 예뻐."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닌..."

 "내 눈엔 예뻐. 그래서 정우야. 나 듣고 싶은 말 있는데."

 "손님 오신 거 같은데."

 때마침 들려오는 종소리에 말을 돌리고 주문한 커피를 가져갔다. 자리에 앉아 마감시간까지 논문을 볼 생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왠지 뒤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지만, 커피에서 새어나오는 열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조금 들이켰다. 한참 동안 논문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정우야, 마감시간인데."

 ", 벌써?"

 "너 그렇게 논문에만 빠져있으니까 몰랐지."

 ". 이 내용이 재밌어서."

 "난 개미와 베짱이 책이 재밌던데."

 "개미와 베짱이 책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 있는지 찾아볼게."

 "아냐 아냐 괜찮아. 나 여기 청소하는 것 만해도 바빠. 다 했으니까 이제 가자."

 네 말에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정리하여 등에 맨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방 들어주려고?"

 "동글아, 이 손은 손잡고 가자는 손이야. 물론 가방도 들어줄 수 있지만, 난 정우 손을 더 잡아주고 싶어."

 네 말에 손을 살포시 올려놓자 너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꼭 잡아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밤길을 걸어가며 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우야, 나 아직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한 너였다. 의도치 않게 무시한 거처럼 말하고 말았지만,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듣는 걸 포기하기 싫은 말인가 싶었다.

 "어떤 말?"

 "정우가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 오늘은 언제 잘 거야?"

 "정우 잘 때 쯤."

 "그럼 같이 자면 되겠네."

 "내가 재워줄 거니까. 그래서 정우야, 나한테 할 말은?"

 다른 말로 주제를 바꿔보려 한 건데 쳇바퀴 돌 듯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오늘 교수님이 새로운 주제로 강의를 하셨어."

 "그래? 그 주제가 재밌었어?"

 ". 흥미로웠거든. 요즘 내 관심사이기도 하고."

 "관심사? 어떤 거?"

 "감정에 대해서..."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살아왔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이성에 묶어둔 채 내 일에 충실하며 고등학교까지 갔는데, 너를 만나 처음으로 감정의 요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요동이 낯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중인건가 생각하며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너를 보면 이 감정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표현하기를 더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또 그 감정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인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감정이 나타난 원인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지, 나는 이 감정으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 감정으로 그 다음에 할 일을 정하여 딛고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주제로 강의해주시던 교수님의 수업내용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대답처럼 들렸었다. 내 감정이 일어난 원인이 너라면 그 결과로 나는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서 처음으로 쩔쩔맸던 그 경험이 내겐 너를 바라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할 말이 있는데."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너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너와 눈을 맞췄다.

 "진우야."

 "."

 "사랑해."

 

 내가 그 말을 건네자 너는 만족하며 기쁜 듯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다 잡지 않은 손을 올려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정우야 그거 알아?"

 "어떤 거?"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도 웃고 있는 거."

 "...난 잘 모르겠는데."

 "난 알아. 이 예쁜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싱긋 웃고 있어. 정말 예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네가 내 입꼬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놀랄 틈도 없이 겹쳐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움에서 네가 보였다.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예뻤는데, 이래도 못 믿겠어?"

 "모르... 몰라. 모르는 걸로 할래..."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정우니까!"

 네가 잡은 손을 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하니까 나도 네 걸음에 맞추어 걸어갔다.

 "정우야."

 "?"

 "나 나중에 카페하나 차릴 거야."

 ", 그거 좋네."

 "그리고 팻말을 달 거야. '정우 외 출입금지'."

 "...나 지금 회계는 나한테 맡겨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회계보다는 내 손님 돼주라. 너만 받을 거니까."

 "그럼 카페 차린 이유가 없잖아."

 "왜 없어? 정우가 오는데."

 "장사 적자 날지도..."

 "건물을 사서 건물주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 좀 나으려나..."

 "그치? 그러니까 정우는 걱정 말고 나만 바라봐. 내 눈엔 너만 보이니까."

 나에게 확신을 주는 네가 고맙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라는 이 감정이 주는 안정과 안도에 따뜻한 기쁨이 흐르는 듯 했다.

 "너에게 꼭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었어. 정우야, 나도 사랑해."

 네가 내게 전하는 진심 어린 고백이 내 마음을 잔잔히 적시는 듯 다가왔다. 너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네가 듣고 싶고 내가 해주고 싶을 때 그 말을 많이, 많이 해주어야겠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진우정우/선생×학생]

 

 

 '좋아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 따위 안하고 있을 텐데. 이 마음을 깨닫기는 참 오래 걸렸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여서 나는 솔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우 왔어?"

 "."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궁금하다고?"

 "."

 "전에도 이 비슷한 문제 가져온 거 같은데?"

 "원래 틀린 문제 또 틀리기 마련이죠."

 "그래도 정우는 잘 풀잖아."

 "아뇨.. 저도 다 잘 풀지는 않아요."

 문과와 이과가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까. 이과를 선택한 나와 문과인 선생님의 접점은 너무 적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께 오는 이유는, 이과학생이라는 편견 없이 대해준 유일한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연히 풀어본 사회탐구 영역에서 모르는 부분이 생겼었다. 해설을 봐도 이해가 안 되서 말로 듣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어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들 '이과학생이 왜 이런 걸 묻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한 선생님들은 이런 거물을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제가 궁금하다는데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혼난 뒤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선생님."

 "? 정우구나. 무슨 일이야?"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요."

 "그래? 무슨 문제인데?"

 "이거..."

 "- 이건...-"

 선생님의 설명에 바로 이해가 됐었다. 역시 설명을 듣는 게 내겐 좋았던 것이다.

 "근데 선생님은 안 말하세요?"

 "?"

 "이과 학생이 왜 물으러 왔냐, 같은 거요."

 "정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건 학생이 궁금한 걸 물으러 왔다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그런 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되는 거고."

 "..."

 내게 수학문제 풀라고 말하지 않아주었던,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오라고 이야기해주었던, 유일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준 선생님.

 그 선생님에게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자각하기란 내겐 의외로 무척 어려운 영역이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당장에 배웠겠지만, 세상엔 내가 배울 수 있는 한계와 내가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질문만 잔뜩 만들어가고 싶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었다.

 "이번 수능에 나왔다는 문제인데요..."

 ", 그렇네. 정우 이제 수능도 쳤고. 곧 졸업하겠네?"

 "...그렇네요."

 대학을 생각안 한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질문을 만들어 갈 수 없단 걸 알고 있었지만. 수능이 끝나고도 나는 이렇게 문제를 들고 왔다.

 "...졸업하면 더 이상 선생님은 못 보겠죠?"

 "왜 못 봐? 스승의 날이나, 정우 공강 날 오면 되지. 그렇지?"

 "그런가요..."

 싫어요. 그런 사제관계는 싫어요. 이제 졸업하면 나도 더 이상 고등학교 제자는 아닐 텐데.

 "...올게요."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과 다른 말이 나왔다는 걸 알고 나자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

왜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 언제든 놀러와 정우야."

 선생님의 미소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지원 넣은 대학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

 천문학과 합격. 수학과 합격. 물리학과 합격. 법학과 합격. 생명공학과 합격. 그리고,

 "여섯 개중에서 한 개만 선택해야 하는데..."

 합격한 모든 걸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은. 이미 내가 나의 한계를 깨닫고 단 하나만 공부하겠다는 결정의 마음이었던 걸까.

 "빠르면... 6년일까."

 재학과정 4년에 군대 2년이니까... . 하긴 선생님도...

 "안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한 번 뵈러 가야겠네."

 보고 싶어.

 "아니... 그냥 인사치례로..."

 보고 싶어.

 "대학 붙었다고 말씀드리러..."

 보고 싶어.

 "왜 내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좋아하니까.

 "...?"

 마음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정신이 번뜩 뜨였다. 말도 안 돼... 그냥 작은 동경심일거야. 그런 선생님은 마땅히 우상이 되실만해. 그래서.

 "그래서 그래..."

 근데 왜 매일 질문을 만들어? 왜 사제 관계는 싫다고 생각한 거야? 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왜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솔직하지 못해?

 "..."

 난 그 의문들에 변명을 하지 못했다. 대답은 하나니까. 그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난 마지막으로 합격된 학과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 지구과학교육과 합격

 

 "선생님."

 "정우야. 졸업 축하해. 선생님 보러 온 거야?"

 ". , 그리고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이번에 대학교 합격 통지서 왔는데..."

 "그래? 어떤 과 합격했어?"

 "천문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법학과, 생명공학 그리고 지구과학교육과 합격했어요."

 "전부?"

 "네 전부."

 "정말 우등생이라니까- 하지만 그 중 한 곳만 갈 수 있잖아.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 저 지구과학교육과 가려고요."

 "정했구나. 정우는 어딜 가든 잘 할 거야 분명."

 "...선생님."

 "?"

 "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근데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언제쯤 말해줄 수 있어?"

 "...아마도 6년 뒤쯤이요."

 "6년 뒤?"

 ". 저도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때 말씀 드릴게요."

 소신 있게 준비한 멘트에 진심이 담겨 선생님께 닿았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지금 듣고 싶은데..."

 "제자라고 달래시는 건가요."

 "? 아니. 정말이야. 지금 듣고 싶어. 정우야 6년은 조금 많이 긴 거 같아. 차라리 지금 말해줘 정우야."

 무얼 말할지는 모르고 분명 말하시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 또한 더 많이 배울 6년을 멋대로 낭비하긴 어렵다. 지구과학 교육과를 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서. 지금 이대로 내 마음을 말하면 선생님에 거절할 거 같아서.

 그런데 거절하는 거라면 6년 뒤에도 똑같을 수 있다. 지금 말해서 나쁠 거 없는 나의 6.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나의 6.

 이런 비겁한 변명을 덧칠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진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1차] 여장 - 3. 내꺼

 

 

 


 "...이게 뭐라고?"
 "정우가 입을 옷."
 그가 내게 생글생글 웃으며 준 옷은 굉장히 단정하고 아름답고 단아해 보이는 하늘색 옷이었다. 하늘색 배경인 것이 색깔은 곱네... 그 위이 수놓아져 있는 우아한 흰꽃은 나랑 그리 어울려 보이지도 않는데.
 "기모노...인거야?"
 "시내 구경하다가 발견해 버려서. 생활 한복처럼 편하고 가볍게 입을 수 있다나봐. 원피스같기도 하고."
 여장을 아껴둔다더니 그대로 잊길 원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옷까지 사와서 나를 당황시킨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나 혼자할 수 있는 여장기술은 지금 주어진 옷을 입는 거 뿐인데... 아, 그러고보니 옷 말고는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나... 가발 없는데..."
 "없어도 상관없어. 난 이 머리가 더 좋으니까."
 그와중에도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사락사락 넘겨주는 그 손길이 좋았다. 그래서 괜히 더 거절하기 힘든가보다. 나는 큰 용기를 얻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네가 준 옷을 꼬옥 잡고는 말했다.
 "갈아입고 올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기다린다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런데도 부족했는지 빨리 다녀오라며 귓가에서 속삭여주기까지 했다. 이런 너를 두고 내가 무슨 핑계를 더 대어 이겨야 하는가. 그냥 내가 완패인거지.
 생활한복 같다더니 확실히 입기는 쉬웠다. 일본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기모노 입는 과정은 정말 길고 섬세하였지만 그만큼 어렵지 않게, 그저 안쪽 지퍼만 위로 올려주면 끝이었으니 정말 순식간에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정말 나랑 안 어울리는데... 안경이 어울리지 않은 거 같아 벗어났더니 안경이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그냥 내가 안 어울리는 거였어.
 실망하겠네, 김진우. 실망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 돼도 않는 내 여장 때문이겠지. 앞서 했던 여장은 전부 나름 전문가의 손길이 거쳤지만, 지금은 나 혼자니까 옷 입는게 전부였다.
 악세사리같은 것도 없고, 꾸밀것도 없고. 차라리 안 어울린다고 빨리 벗으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나을거 같았다. 그럼 당장에 나가드려야지.

 

*   *   *

 


 왜 이렇게 되었지.
 "...김진우."
 "응?"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내가 만족할 때 까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자세는 날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어깨에 파묻고 있는 자세인데, 이거 너무 치사하지 않나.
 입고 나가자 그는 잠깐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을 제 시선에 고정시키고는.
 "너무 예쁘다..."
 그의 눈에 거울처럼 비친 내 모습이, 마치 그의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아낸 듯한 모습이었다.
 "진짜. 진짜, 예뻐."
 "예쁘긴... 하나도 안 어울리던데..."
 거울을 보고 또 보아도 어울리지 않았던게 당연했다.
 "연정우 정말 너무하네."
 "뭐...?"
 "예쁘단 소리 계속 듣고 싶어서 겸손한 척 하는 거 봐."
 "..."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란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 목구멍 넘어로 나오게 할까보냐... 표정을 찡그리고 있자 그가 내 머리에 제머리를 맞대었다.
 "키스할까...?"
 네 질문에 그저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좋다고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게 보이는데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 내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거... 내가 지금 여자같아서 하자는 거야?"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가만히 두질 못하겠어..."
 "가만히 두지 못하는건 뭔데. 그냥 가만히 둬도 되는데."
 "아니, 키스하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어."
 그 말을 끝내고 내게 다가와 쪽쪽 입을 맞추었다. 볼에도 쪽쪽. 콧등에도 쪽쪽. 입술 닳겠네.
 "여자 같아서 이러는 거 아냐. 연정우라서 이러는 거지."
 "예뻐서 가만 못둔다 말해놓고는..."
 "몰랐어? 정우는 학교에서도 예쁘고, 그냥 있어도 예뻐. 지금은 내 앞에서 예쁜 옷 입은 거고."
 "참나..."
 네가 다시 어깨에 파고들어 얼굴을 부빗거렸다. 간지러우면서도 짙게 남는 너의 여운이 좋았다.
 "이렇게 예쁜데. 나한테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내를 당당하게 돌아다니기나하고."
 "윽...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여장을 했든 안 했든 정우는 나만 볼거야! 내꺼야!"
 "그래... 네꺼해. 다른 사람은 줘도 안 받을테니까."
 "다른 사람을 왜 줘. 내가 있는데."
 네가 나를 안 놔줄듯이 꼬옥 끌어안았다. 마치 빈틈을 없애려는듯 그렇게 가까이에서 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동글아."
 "응?"
 "우리 키스는?"
 "......"
 침묵을 지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듣고 무시한 건 아니니까 그런 눈빛 보내지마... 나는 네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하던가..."
 네가 다시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너의 부드러운 혀가 입술을 살짝이자 입이 열리고 혀가 얽히기 시작했다. 네가 가는 방향대로 천천히 움직여 입안을 헤집었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훑는 너에게 나를 맡겼다. 한참을 움직이고 숨이 차오를 때 쯤, 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좋다..."
 "...좋아?"
 "응. 정우 너무 예뻐서 좋아."
 너는 나를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하나라도 놓칠새라 열심히 나를 바라봐주었다. 나도 온전히 너만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정우는 어때?"
 "응.. 나도 좋아."
 "그래? 나 때문에?"
 "당연히 너 때문이지."
 "응. 하아.. 이 모습은 제발 나에게만 보여줘."
 "욕심쟁이. 베짱이 성격 어디 안 가나봐."
 "베짱이가 왜 욕심쟁이야! 아냐. 난 그저 우리 정우를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
 "그래서 욕심쟁이라는 거다. 너만 나를 독점하고 싶어하잖아."
 "사랑하니까."
 "용서되는 변명이군."
 "정우는? 나 어때?"
 "나도.. 사랑해."
 "응. 그거면 충분해. 정우는 내꺼야!"
 "그래. 그리고 진우는 내꺼고."
 "충분히 가져줘. 전부 다 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미소는 정말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무엇을 하고 있든 정말 다 용서되는 저 미소가 나는 정말 좋았다.
 "그래. 내가 다 가질게. 너도 가져가."
 "내꺼니까 당연하지."
 네가 내 손을 꼬옥 잡고 올려서 도장찍듯 손등에도 입을 쪽쪽 맞춰주었다. 참 간지럽고도 예쁜 서약처럼 보였다. 아마 그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네가 내 입가를 손으로 매만져주면 예쁘다-, 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나는 또 너때문에 웃음이 났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네꺼니까. 나 계속 여기 있을래. 어디 가지 않게 잘 잡아주는 손처럼 네가 날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만큼 널 사랑하니까.

 "다음에 또 옷 입어줄거야?"
 "안 입을거야."
 "입어줘."
 "무슨 옷."
 "웨딩드레스."
 "결혼해?"
 "할건데?"
 "정말 대책없네..."
 "신혼여행도 가고. 응? 정우야. 응?"
 "몰라... 나중에 해. 나중에."
 "너 나중에 하자고 한거다? 나 안 잊을거야."
 "프러포즈 마음에 안 들면 안하고."
 "너의 마음에 들게 할게.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꼭 보고 싶어."
 "입어도 별로일텐데."
 "아니, 우리 정우라면 분명 예쁠걸."
 "너 수트입은 것도 멋지겠네."
 "정말? 좋아. 우리 결혼하자."
 너의 진지한 모습에 다시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진지한 모습은 보기 드물어서 그런지 기대고 싶은 심리감이 치솟은 듯 하였다.
 "멋지네 김진우."
 "에쁘다 연정우!"
 네가 나를 꼬옥 안아서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몇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사랑해. 내게 이런 기대감과 설렘을 준 너를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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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을 2년 전에 쓴다 하고 그대로 놔뒀는데, 다행히 쓴 건 있어서 조금 수정하고 이어 썼어요! 흑역 투성이네요ㅜㅜ 이제 또 다른 썰 풀어봐야겠어요 ㅎㅎㅎ

[1/단편] 임청아랑 연정우

 

 

 

# 1.

 

여어어언- 저어어엉- 우우우우우-!!!”

“......”

저 멀리서 손 흔들며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향해 달려온다. 그 여자는 남자와 동갑이라 다른 호칭이 없다. 그냥 편하게 대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왜 남자의 표정은 그리도 썩어 있는가.

오지 마...”

싫은데!”

제발 오지 마...”

네가 불렀잖아-!!!”

그래도 달려는 오지 ...”

시이이이- 르으으은- 드에에에-!!!”

하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남자가 피곤한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겠지.

무거워...”

나 가볍거든!!! 많이 컸네, 연정우!!!”

입 다물고 내려와 제발...”

남자는 습관적으로 벌점을 먹이고 싶었지만 다른 학교여서 그러질 못했다. 왜 다른 학교 인거지-하지만 같은 학교라도 이런 일로 벌점 먹이는 건 불가능하다.-.

처음 만났는데 이럴 거야!!!!”

설 때 봤잖아...”

오늘 보는 건 처음이잖아!!!”

너 제발 목소리 크기 좀 줄여...”

싫어!!!!!!”

“......”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 2.

 

, 만난 김에 이것 좀 봐줘.”

뭔데.”

편지.”

편지라며 건네는 여자의 편지를 남자가 받았다. 혹시 저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읽어 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하다.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데.”

애인!”

, 애인.”

여자에게 언제 애인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한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런데도 내용이 이상했다.

애인이 누구인데.”

누구일거 같아?”

“...사람은 맞지...?”

아닌데!”

애인...이라며.”

내 애인이 누가 또 있겠니.”

“...만인의 사랑을 네 걸로 착각하지 말아줄래.”

여자의 애인 이름은 바로 초콜릿’. 여자는 흔히 말하는 초코덕후였다.

그래서 잘 쓴 거 같아 못 쓴 거 같아?”

나한테 묻지 마.”

그럼 내가 읽어 줄 테니 잘 들어봐.”

여자는 남자에게 건넨 편지를 다시 뺏어 들어 큼큼,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자신이 쓴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본 그 어떤 것 중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답다. 그렇게 멋진 너에게 나는 내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써가며 고백한다. 앞으로 너만 사랑할거고, 앞으로 너만 바라볼 거다. 그러니 나의 마음을 받아줘. 난 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넌 멋지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달콤하고 맛있고... 난 너의 피부색이 어떻든 다 좋아할 수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 꿈에도 네가 나올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나의, 초콜릿.”

“......”

-필자가 약속한 청아 고록을 완성했다. 낚고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다.- 남자는 이상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애인한테 보내는 거라며. 이건 고백 글이잖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답장이 없으면 수락이지!!!”

“......”

남자는 할 말을 잃은 참이었다.

 

 

# 3.

 

정우는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에게 묻는다. 남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어라라, 무소식이 희소식? 정말 생긴 거야?”

“......”

뭔데 뭔데, 누군데 누군데???”

“...몰라 묻지 마...”

정말? 연정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 설마 내 애인은 아니지...?”

“...?”

내 애인은 안 돼!!!”

초콜릿은 아니거든...”

, 그럼 제대로 사람이라는 거네! 누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람.”

오오... 연정우가 드디어 사람을... 사람을... 어떻게 생겼어???”

“...잘 생겼어.”

이름은???”

굳이 아려는 이유는...?”

궁금하니까!”알아서 뭐하게...”

리재현한테 말하려고!”

“...걔는 누군데.”

초코동맹 회원!”

말해서 뭐하려고...”

초코동맹에 오라고 꼬시려고. 강추!!!”

“......”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죽어도 여자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고 또 한 번 다짐한다.

 

 

# 4.

 

넌 근데 왜 이리 신났어.”

우리 정우 만날 생각하니까 신나서!!!”

“......”

사실 여자와 남자는 사촌이다. 동갑내기 사촌. 외가 사촌이기에 성이 다르다. 어렸을 때 같이 다닌...

정정하시지. 끌려 다녔거든.”

? 누구한테 말하는 거? 연정우 드디어 미친 거?”

“......”

...끌려 다닌 터라 나이를 먹어도 서슴없이 잘 지내고 있는 편.

그나저나 어렸을 때는 참 우리 정우 귀여웠는데~”

어렸을 때 임청아는 사내 대장부였지.”

말 다했냐.”

여자의 머리 위에 빠직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만 무시하는 쪽으로 남자는 생각했다.

“...여행가고 싶어서 그런데 돈 빌려줘.”

?? 뭔 여행?? 랄까 돈 없거든!!!”

돈 많잖아.”

우리 회원님 먹여 살리느라 바빠. 당충전은 꼬박꼬박 해야 하거든.”

흐음,”

게다가 여행이라면 한 두 푼 아니잖아? 그렇게 큰 돈 없단 말이야.”

그렇군... 그럼 돈 빌리는 건 포기. 이제 각자 헤어지자.”

잠깐 잠깐, 연정우씨? 지금 이 누님을 고작 돈 얘기 하려고 부르셨나요???”

누님은 무슨... 내가 생일 빠르거든.”

그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앙? 얼른 돈 빌리려고 했던 목적이나 불어!!!”

말했잖아, 여행이라고.”

그거 말고!!! 여행의 본 목적 말이야!!!”

 

 

# 5.

 

아 그러니까, 으음- 그래서 그러니까, 으음-”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남자가 여자를 만난 목적은 사실 돈 때문이기도 했으나,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촌인 여자를 만나면 여자의 멍청한 회로 때문인지...

누가 멍청하데?!”

맞는 말 했는데 왜 그래.”

우씨... 들리니까 열나네...”

...그래서 그랬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시간이 지나가는 걸 만끽 할 수 있었으니까.

여하튼 오늘 만나서 나름 즐거웠어, 임청아.”

계속 말 돌릴래? 여행 목적이나 불어.”

아까 알아듣는 척 다 해놓고 뭘 하라고?”

그렇게 하면 좀 똑똑해 보이는 줄 알았지.”

누구도 너 똑똑하게 안 봐. 근데, 여행 목적을 말하면 나한테 돈이 생기나?”

들어보고 타당한 이유가 된다면, 조금은 용돈으로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럼 들어봐. 내가 여행가는 건...”

속닥속닥-, 소곤소곤-, 웅얼웅얼-, 중얼중얼-.

지금 사귀는 애인하고 여행가고 싶다고?!?!?!?!?”

“......”

여자의 성격을 아는 남자였지만, 얘기하고 나니 부끄러움은 남자의 몫이 되고 말았다. 남자도 자신이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가 후회중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타당한 이유는 초코투어 뿐인 걸. 넌 안 되겠다.”

“...그래. 안 될 거 같았어.”

남자는 덤덤히 이어 대답했다.

그래야 임청아 답지.”

역시 날 너무 잘 알아.”

 

 

# END.

 

즐거웠다, 정우아우.”

어디서 아우를 붙여. 생일은 내가 빠르다니까.”

하지만 정우형 보단 정우아우가 더 입에 착착 붙는데.”

오빠란 호칭은 어디가고.”

정우오빠는 너무 오글거리지 않냐? 그러니까 패스. 대신에 따라해 봐. 청아누나- ”

입 다물어, 청아꼬맹이.”

. 꼬맹이??? 야 연정우 말 다했냐!!!”

응 다했다, 꼬맹이. 고로 오늘 잘 가고 추석 때 보자.”

겨우 추석 때냐! 중간에 좀 보자구!!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고!!!”

너랑은 싫네. 그럼 잘 가.”

, 그래 잘 가라. 가다가 꼬꾸라져 버려.”

너나.”

 

서슴없는 모습은 참 좋다. 필자는 또 언제 이 둘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쓰는데 나름 재미있었으므로 또 언젠간 풀지 않을까 싶다

※ 미마님(@MIMA_castlavie2)의 종교마츠로 쓴 글입니다.

※ 주제 - 악마에게 현혹된 여신을 믿는 신부

※ 출처 - https://twitter.com/MIMA_cestlavie/status/1100368317858996224

 

 

[종교마츠] 당신을 위하여

 

 

 

 나의 여신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감사함을 믿음으로 모아 이 한 몸 바쳐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한 줌의 흙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 날까지도 나는 당신께 기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여신님이여. 부디 오래도록 이곳을 살피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귓가에 닿자 정신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눈이 천천히 뜨이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밤이네. 다시 눈을 감기도 애매하여 간만에 달이나 볼까, 하고 팔을 휘적거리며 물 위로 올라가보았다.

 , 아름답다. 나는 까만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달인건지, 금세 저 하늘에 마음을 빼앗겨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마 다른 누군가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이미 달을 향한 시 한 편을 적어 올려 보냈으리라.

 "~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면 좋을 텐데~"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런가~ 근데 여신님.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원래 밤에는 잘 안 나타나잖아!"

 ", 그게. 아무래도 누군가의 기도가 들려온 거 같...아서 랄까, 악마가 왜 여기 있는 거죠."

 "~ 기도라는 거 그렇게 큰 소리로 하는 거? 랄까, ? 나야 뭐~ 여신님 계신 곳은 어디든 있을 테니까?"

 "스토컵니까?"

 "꽤나 로맨틱한 대사였던 거 같은데?!"

 "전혀 아니었으니 돌아가 주시죠."

 "에에- 모처럼 여신님을 이 야심한 밤에 만났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 안됩니다. 근데 이리 말씀드려도 안 돌아가실 거잖습니까."

 "크으~ 역시 우리 여신님. 내가 여신님 좋아하는 걸 이리도 잘 알아요~"

 코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대는 이 요물은 흔히들 말하는 악마다. 하지만 악마치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신의 신성한 힘과 성수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 있기론 신의 힘이 먹혀들지 않는 악마는 힘이 아주 강하거나 아님 힘이 아예 없거나 인데, 내 생각에 녀석은 후자라 진작에 녀석을 막지 않았다. 녀석에게 힘을 쓰는 건 힘 낭비,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그래서 놔뒀거니 녀석은 시시때때로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이 밤에 만남도 그런 연유이겠지.

 "여신님 있잖아."

 "?"

 "저 달 갖고 싶어?"

 녀석은 자신의 손끝으로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가리켜보였다. 저 녀석이 참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달은 만물의 것이니 저 하늘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 그런가... 그래서 포기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면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애초에 갖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습니다."

 "흐응..."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녀석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바라보지 싶어 나도 녀석과 눈이 마주쳤는데 녀석의 감정이 어린 눈빛이 보였다. 저 눈빛은 마치.

 "나는 욕심나는데."

 "?"

 "나는 달이 갖고 싶어."

 "..."

 "포기할 마음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날아온 녀석을 난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차, 왜 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깨달았던 건 녀석이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여신님, 당신의 눈에 비친 그 달이 참으로 아름다워..."

 "악마..."

 "부디 나만의 달이 되어줘, 여신님..."

 그 때 녀석의 눈빛은 마치, 한순간 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던 나의 감정이 담긴 눈빛과 똑같아 보였다.

 

  오전 예배시간이 다가오자 성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있는 연못에서는 성당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내가 성당으로 갈 수도 없기에, 나는 이곳에서만 성당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를 하면 내 귓가에 간절함이 닿는다. 진심이 담긴 간절함이 닿으면 신의 신성한 힘을 조금씩 나누어줄 수 있었다.

 "기도한다고 전부 들어주지는 않아요."

 손을 모아잡고 눈을 감아 오늘도 부디 진심이 담긴 기도가 빌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예배시간 인가봐?"

 기도와 달리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기분이었다. 기도가 닿길 바라는 마음과 방해받는 건 별개의 일이었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어서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신성한 시간에는 악마와 상종하지 않습니다."

 "흐응- 그럼 좀 이따 올게?"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녀석의 기척이 사라졌다. 갔구나. 이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기도가 시작됐는지 허울 좋은 말들이 귀에 닿을 듯 말 듯 희미하기 들렸다. 오늘도 글렀구나. 지난밤의 기도는 그리도 선명하게 들려서 잠을 깨웠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기도 듣기가 참 어려웠다.

 "...그 기도는 신부님 것이었나."

 신에게 몸을 바친 인간은 그냥 인간보다 신에게 한 발짝 더 가깝기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부님의 기도가 남들보다 훨씬 진심인 것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신부님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기도가 내게 닿기를 바라고 있다. 더 많은 간절함이 내게 닿아 더 많은 이들의 바람을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평화롭고 안온한 세상이 만들어 질 텐데. 내 힘이 모자란 건지, 아니면 진심이 흑심으로 덮인 건지. 기도를 들을 수 없는 이유를 알지 못해 이렇게 답답해하고만 있다. 귀를 더욱 바짝 기울여 내게 진심이 닿는 이들에게 신의 신성한 힘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난 뒤에야 예배시간이 끝났다.

 "여신님- 예배시간 끝났어?"

 녀석이 끝나는 건 귀신같이 알아서 찾아왔다. 천천히 오거나 아예 안 오면 더 좋았을 텐데.

 ", ... 오전 시간은 끝났습니다."

 "- 있잖아 여신님."

 "?"

 "기도, 안 들리지?"

 갑작스럽게 허점을 찌르는 물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이런. 속내를 쉽게 들키면 약점 잡히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텐데. 재빨리 눈을 감고 평정을 찾고자 애썼다.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신이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 마음을 진정시키자마자 재빨리 미소를 찾아 지었다.

 "요즘 희미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나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죠."

 "그냥. 직접 성당으로 가서 들으면 훨씬 잘 들리지 않을까하고."

 "...글쎄요. 저는 이곳을 빠져나가 본 적이 없고 또 빠져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거야 여신님의 힘의 근원지가 이 연못의 성수라 그런 거지. 근원지가 끊기면 신성한 힘을 못 쓰잖아."

 "물론 그렇죠..."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저리도 나불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채로 바라보기만을 줄곧, 한참이 지나자 녀석의 입이 열렸다.

 "그럼 있지~ 힘의 근원을 바꾼다면?"

 "...?"

 "알잖아 여신님. 내가 신성한 힘에 면역이 있다는 거. 사실 정확히는 안이 텅텅 비어있어서 막을 힘이 없는 거지만~ 이건 성수에도 해당된다고?"

 "그래서요...?"

 "내가 성수를 텅텅 빈 안쪽에 가득 채워 넣을게. 그럼 나도 성수와 비슷한 파장을 낼 거 아냐? 그럼 나로 인해 여신님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님?"

 이상한 이론을 떠들어대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성수로 가득 채운다고? 악마가?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고...! 물론 녀석에게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는 있지만. 굳이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해본 적 없는 일이에요."

 "그야 도전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요."

 "그러니까 해보자는 거고~"

 "왜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야-..."

 녀석이 내게 다가와 지난밤처럼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와 눈을 마주쳤다.

 "여신님은... 내 달이잖아?"

 "..."

 "물론 만물을 위해 그 자리에 있어줘야 하지만. 가끔은 괜찮잖아? 원하는데 있어도. ?"

 악마의 유혹이란 건 이런 걸까.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이리도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마음이 끌릴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이 묻어두어 자각도 못했는데 녀석은 어떻게 내 열망을 이리도 자극할 수 있었을까.

 "밑져야 본전이잖아~ 솔직히 여신님께 손해 가는 것도 없고! 어때?"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손을 잡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했지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내 마음은 결정된 사항이었다.

 나는 녀석이 내민 손에 살며시 손을 포개어 올렸다.

 

 녀석에게 성수를 주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어를 위한 공격이 아니라 종이에 물 스며들듯이 주입하니 온전히 그 힘이 다 들어갔다.

 "어떠신가요...?"

 "으음- 잠깐만..."

 녀석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펼치더니 연못에 손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나는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헤에... 이런 느낌인가?"

 "뭘 하고 계신건가요...?"

 "? - 어떤 파장이 맞는지 제어보고 있었어."

 저걸 저런 행동으로 알 수 있을까. 반복하고만 있는 동작을 몇 번 하다가 녀석이 갑자기 활짝 웃어보이곤 내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뭡니까?"

 "이제 여신님이 나올 수 있을 거 같아서!"

 그 말에 머뭇거리다 호기심 반 긴장 반으로 손을 올렸더니 녀석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아들게 했다. ...! 안긴 게 놀라서 버둥거리자 녀석이 두 팔로 꼭 안아 진정시켜주었다.

 ", 여신님. 이 느낌이지?"

 ".... 확실히..."

 녀석이 품은 성수의 힘 때문인지 잔잔한 연못 속에 있는 거처럼 안정되고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힘의 근원이 옮겨졌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인 걸까.

 "오후 예배시간은 언제지?"

 "곧 시작되긴 합니다만..."

 "그럼 바로 성당으로 가야하는거지?"

 ".... 가고 싶습니다."

 "그럼 예배 끝나고 나랑 데이트하면 안 될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뭐어- 여신님 이제 나한테 이렇게 안기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쟌?"

 그 말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녀석은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걸까. 작게 숨을 내뱉곤 대답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원하는 곳에 한 번 쯤 발을 들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흐응- 그 마음을 좀 더 키우면 이곳저곳 갈 수 있을 텐데."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하죠."

 "네이 네이-"

 내 말을 잘 알아듣긴 한 건지 녀석은 나의 어깨와 다리를 두 팔로 단단히 감싸고 안아들어 하늘을 날았다. 처음 맞는 하늘의 바람은 연못에서 맞던 바람보다 훨씬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늘 올려다보기만 했는데 이제는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마치 하늘을 마주하는 신이 된 기분이었다.

 "하늘을 처음 날아본 소감은 어때?"

 "...나쁘진 않네요."

 "그럴 땐 좋다, 라고 표현하는 거지~"

 "...당신은 어떤데요?"

 "나는 엄청 좋아~!"

 "그러신가요..."

 "! 나의 달과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해..."

 "..."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녀석에게 일일이 대꾸하면 왠지 내가 나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그 하늘을 즐기기만 했다. 언제까지고 즐길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지금을 만끽하고 싶었다.

 얼마나 만끽하고 있었을까, 녀석이 고도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 거의 다 왔나보다. 궁금해 하지 않아도 성당 근처에 도착했다는 것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

 "고맙습니다..."

 녀석에게서 내리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당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처음 마주한 성당의 모습은 굉장히 거대하고 화려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보이지도 않는 신께 기도를 드리고, 신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겠지. 어쩌면 서로가 미련했을지도. 또 어쩌면...

 "여신님."

 "?"

 "이제 강림할 시간이야."

 생각이 흩어지자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망설일 이유도 명분도 없던 나는 녀석이 내민 손을 꼭 잡았다.

 

 녀석을 따라 성당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 쪽 정면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보였다. 우리는 그 곳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 모습은 안 보일거야."

 "그런가요?"

 ". 대신에 여신님의 힘을 조금 쓴다면 여신님은 보일지도 모르지?"

 녀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가. 신의 신성한 힘을 쓴다면 보일 수도 있구나. 나는 녀석과 함께 그들이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는 십자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이들에게 내 모습이 보이기를. 그렇게 눈을 감고 빌고 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

 그 목소리는 지난 밤 간절히 기도했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아아, 누군지 알거 같아. 눈을 살며시 뜨고 바라보자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그 분.

 "신부님!"

 당신을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줄 몰랐다. 나는 기쁜 마음에 모았던 두 손과 두 팔을 넓게 펼쳐 신의 신성한 힘을 넓게 퍼뜨렸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내 모습이 보이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큰 소리로 나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그들의 기도를 듣고자 하였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주기 위해 나는 내 선택과 의지로 여기에 왔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아직도 기도가 들리지 않는 거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렇게 모두가 보이는데. 나는 여전히 귀가 뚫리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가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귓가에 들려오는 건.

 "아아- 즐거워라-"

 내 뒤에 서있는 악마의 목소리.

 "..."

 ", 여신님- 신의 신성한 힘을 뿌려야지 않아?"

 "그렇죠... 하지만..."

 "아아- 아직도 안 들려?"

 "그게..."

 "괜찮아. 내가 여신님 대신 기도를 들어줄게."

 "...?"

 "몰랐어? 나 여신님이랑 계약해서 여신님과 같은 힘을 쓸 수 있거든."

 녀석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하던 사이, 녀석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나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뿔과 꼬리를 숨기고 내가 입은 하얀 옷으로 바뀌자 영락없이 내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던 녀석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신부님을 바라보자 내게 향했던 시선이 녀석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 모습이 안 보이는 거야...? 움직이려고 하자 힘이 점점 빠져나가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녀석이 내 입과 힘을 봉인시켜 놓고, 나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활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 입 닫아줘.

 "여신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구제해주겠노라."

 제발 그만해.

 "그러니 원하는 것은 모두 지금 말하라."

 그만 말해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   *   *

 

 

여신님이 쓰러졌다. 그렇게 충격 받을 일이었나. , 신의 신성한 힘을 빌려 쓴 것에 대한 결과겠지.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여신님의 모습을 똑같이 복제했는데 여신님이 쓰러진 탓에 내가 힘을 못 받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네?

 "악마..."

 "~ 신부님!"

 내 모습이 보이자 신부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저 순진한 눈에 증오를 심고 계셨네. , 당연한 일인가?

 "지금은 보는 눈도 있고- 어차피 여신님이 쓰러져서 신부님 외에는 날 보지 못할걸? 감정 흐트러지기 전에 어서 예배부터 끝내시지?"

 그래, 아마 저 인간들 눈에는 여신이 강림했다가 사라진 걸로 보일걸? -, 하고 콧방귀를 뀌어 보이니 신부님은 다시 평정을 찾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하, 보이지 않던 신의 등장에 이렇게나 열렬해질 줄이야. 재밌네, 보기 좋아. 나는 여기서 친히 기다려줄게. 신부님께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말이지.

 열렬했던 예배시간이 끝나니 인간들은 성당을 하나 둘 나갔다. 그렇게 텅텅 비자 신부님과 나, 그리고 아직도 쓰러져 있는 여신님 셋만 남았다.

 "신부님~"

 "악마... 여기 뭣 하러..."

 "뭐하긴! 당연히~..."

 "이곳은 네가 못 들어오는 곳인데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

 그래, 나는 이곳에 못 들어왔다. 들어 오려하면 신성한 곳이란 이유로 튕겨져 나가진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나 이곳 엄청 좋아하는데! 근데 저 신부님은 날 여기 못 들어오게 막아 놓기나 하고!

 "당연히 여신님의 힘으로 들어왔지~ 믿음으로 힘을 얻는 걸 여신님 혼자 독점하는 건 이기적이쟌? 나도 힘 얻고 싶다구~"

 "말 같잖은 소리를..."

 '신의 신성한 힘' 100퍼센트 완벽한 신의 힘이 아니란 말이야! 신 혼자는 절대 못 써! 인간들의 기도와 믿음을 빙자한 간절함이 50퍼센트 정도는 있어야 신의 계급을 받은 녀석들은 다 쓸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대량의 믿음과 간절함만 받는다면 그까짓 힘은 충분히 쓸 수 있는데...!

  나 같은 악마는 인간들을 하나씩 일일이 꼬셔야 하지만, 이런 커다란 성당은 인간들이 알아서 대량의 믿음을 가져와 준다.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성당에는 서있기만 해도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저 망할 신부님 때문에 내가...

 "하지만 말야- 내가 이곳에 이렇게 들어 올 수 있게 된 거 신부님 덕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너는 여신님의 힘으로 들어온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하하- 그 도움도 있었지만- 애초에 난 원래 여신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옆에..."

 "그거, 신부님이 기도 드렸잖아."

 "...내가?"

 "- 간밤에 신부님이 기도드렸던 거. 나도 듣고 있었으니까-"

 헬쭉- 웃어보이곤 쓰러진 여신님께 다가갔다. 역시 내가 여신님의 힘을 많이 가져가서 쓰러지셨네. 지금 이곳에 믿음을 줄 인간들도 없기도 하고, 내가 갖고 있는 성수의 힘으로 그 분을 깨우는 건 턱없이 부족한 일이었다. 하긴 나는 성수의 힘을 무한대로 낼 수도 없을 뿐더러, 근원을 바꾼다는 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나는 그 분을 안아들고 신부님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계시면 분명 소멸당할 거니까. 더 얘기 나누고 싶다면 연못으로 와, 신부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못 참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좋아서 손이 떨렸다. 아아,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럼 여신님께 미움을 사겠지? 신부님도 보아하니 나를 죽이고 싶나 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신부님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나약해빠진 십자가를 두 손에 꼭 쥐고 기도를 드리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상종할 이유 따위 없었다.

 

 여신님을 연못으로 데려가 담갔더니 저절로 잠식하였다.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처음 여신님을 만났던 것이 기억났다.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여신님이 계신 연못을 바라보았다. 기도를 듣고 있던 여신님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달과도 같았기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큰 용기 먹고 다가가면 그 멀리서도 성수의 힘이 사정없이 공격해왔다. 그래서 여신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정말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최대의 행복이라 생각하며 바라보기만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여신님께 다가가도 공격당하지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예상대로 성수의 힘이 나한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성수가 공격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내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여신님께 다가갔다.

 "안녕 여신님?"

  "...악마?"

 내가 악마란 이유로 잔뜩 경계심 받아버렸지만 어째서인지 여신님의 직접적인 공격에도 전혀 다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열심히 공격당했지만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결국 여신님은 날 공격하는 걸 포기하시고 내가 나타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여신님~"

 "또 오셨습니까."

 "! 여신님 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당신은 텅텅 빈 것 같습니다."

 "텅텅?"

 ". 당신이 제게 올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은 신의 신성한 힘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흐응..."

 여신님은 내가 공격당하지 않는 걸 '텅텅 비었다.'라고 표현하셨지만, 글쎄. 과연 나는 텅텅 비었을까. 성수가 저항하지 않는 힘. 여신님께 다가오기 전에는 분명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내 힘이 정말 전부 텅텅 빈 것일까?

 텅텅 비었다면 채워야지. 명색에 악마인데 무언가를 이루어줄 힘도 없이 누군가를 유혹하여 계약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중에 힘을 채우기에 아주 적절한 분이 내 옆에 있었다. 계약을 이용하여 그 분의 힘을 얻는다면 나는 그 분도 갖는 것이 되는 거 아닌가. 다가갈 수도 없던 시절보다야 지금이 훨씬 행복하지만, 이보다 더한 욕심이 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나의 달을 가질 수 있다는데.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정말 멍청한 이의 짓이 아닐까.

 그래, 여신님과 계약하자. 계약해서 여신님의 영혼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자. 솔직히 여신님을 상대로 계약하는 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한 평생 누군가를 유혹하는 일을 해왔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여신님과 계약하기, 그것을 최종 목표로 삼자 낯익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여신님께 다가올 수 있었던 아주 결정적인 이유가 담긴 그 신부님의 기도가.

 「 나의 여신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감사함을 믿음으로 모아 이 한 몸 바쳐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한 줌의 흙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 날까지도 나는 당신께 기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여신님이여. 부디 오래도록 이곳을 살피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라니."

 웃겼다. 그 기도가 내게도 들리던 그 날 밤, 나는 너무 웃겨서 배꼽잡고 웃었다. 난 내가 텅텅 빈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텅텅 비어있던 건 신부님이던데? 아하하- 저런 기도를 매 밤마다 하고 있었으니 내 힘이 무효화될 수밖에.

 "내 힘을 악의 힘이라고 인지하고 없앤 거잖아!"

 하하- 나를 성당으로 들이는 일은 그렇게 혐오하더니 그런 기도를 드리며 여신님 옆에 나를 두게 하였단 말이지. 그건 어리석은 신부님이 자초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걸 있는 그대로 이용해드려야죠. 나도 머리 굴릴 줄은 안단 말이지?

 

 회상에 잠겨있다 보니 누군가가 오는 것을 몰랐었나보다. 그러나 누가 왔는지는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 와주셨네, 신부님?"

 "...여신님은 어디계시지."

 "회복하러 가셨어. 걱정 마, 해를 끼치진 않았으니-"

 "..."

 "워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으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날라 간다구?"

 "나는 대화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뭐 하러 온 건데."

 "악마를 처단하러 온 것이다."

 "- 나를?"

 "이 이상으로 여신님을 흉내 내는 짓은 없어야하지 않겠나."

 "흐응-... 근데 이를 어쩌나? 나 이미 여신님이랑 계약했는데?"

 "...?"

 "뭘 그리 놀라?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까는 나 때문이라 하더니..."

 "그것도 맞고."

 "..."

 "자자, 이 몸이 친히 고해성사해 줄 테니 잘 들어. 한 번 밖에 안 말할 거니까 딴 짓하면 안돼요~"

 신부님께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의 기도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부터 내가 여신님과 계약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여신님이 내 손을 잡았던 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아무리 내가 텅텅 비었다지만 본래 악마라서 계약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원래는 소원 같은 걸 이루어주거나 그럴만한 힘이 필요하지만, 뭐 어때. 여신님이 원하는 소원은 그런 무지막지한 힘이 없어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소소한 거였는걸.

 진실을 숨기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듯이 아름답게 덮어 말하자 안타깝게도 세상 물정 모르는 가여운 여신님은 나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성수의 힘을 내 안에 가득 주입해주었다. 텅텅 비었다는 걸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성수의 힘이 들어오자 확실히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묘한 쾌감에 기분이 아찔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여신님이 의존할 수 있는 힘의 파장을 찾아내었다. 성수의 힘은 여신님 힘의 근원지이며 여신님의 생명줄이기도 하니까 여신님은 온전히 나한테만 의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때?"

 "무엇이..."

 "여신님이 나한테만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니까?"

 "..."

 "~? 당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따르던 분이 이제 나없인 못 산다니까?"

 "그래서... 널 처단하면 안 된다는 건가..."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 거야?"

 "..."

 내 이야기를 드디어 이해해준 신부님이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게 보였지만 눈감고 무시했다. 하하- 이보다도 합리적인 계약이 또 어디 있을까. 신부님 덕에 힘은 사라졌지만,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여신님을 옆에서 볼 수 있고 여신님의 힘을 빌려 쓸 수 있고 여신님은 이제 내가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저 망할 신부님은 내 털끝하나 건들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여신님은 내 것이다. 그 분의 영혼까지도 모두, 내 것인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 신부님."

 "..."

 "돌아가서 지금까지처럼 여신님 믿는 인간들을 잘..."

 "여신님..."

 "...?"

 신부님이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나보다 더 뒤 쪽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 세 여신님이 수면 위로 올라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드디어 일어나셨구나. 당신을 보고 있자니 설레는 감정이 어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여신님~ 이제 일어났어? 보고 싶었어!"

 나는 해맑게 웃어보였지만 여신님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여신님의 시선조차도 내게 향하지 않았다. 나를 두고 어딜 보는 건지. 기분이 나빠져서 당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 끝에는 신부님이 있었다.

 "...여신님." "돌아가 주세요, 신부님."

 "하지만..."

 "나중에 신의 부름을 이용해 부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돌아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신님의 말에 망부석 같았던 신부님은 끝내 발길을 돌렸다. 그제 서야 여신님의 시선이 오롯이 나에게 닿았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악마..."

 "! 여신님~"

 "저는 왜 쓰러졌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씨익 웃어 보였다.

 

 누군가의 기도가 귓가에 닿자 시선이 한 곳을 가리켰다. 눈을 천천히 옮기자 보이는 것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밤인데. 다시 눈을 부벼 보았지만 간만에 빛이 보여 날개를 펄럭거리며 빛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 아름답다. 나는 까만 연못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달인건지, 금세 저 연못에 마음을 빼앗겨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마 다가갈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미 어둠뿐만 있는 저 하늘로 도망가 버렸으리라.

 "좋아해, 여신님."

 신부님께 고해성사 했듯이 당신께도 지금까지의 내 모든 걸 고백했다. 당신을 처음 본 그 날부터 지금까지. 설사 미움을 받더라도 나는 눈앞에 있는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

 "나를 바라봐줘."

 "바라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저는 이제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뢰 안 해도 돼."

 "믿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걸 져버리라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약했잖아. 그런 거, 우리 사이엔 쓸모없는 걸."

 "그래도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한 없이 단호하게 굴지만 나를 내치지 못 하고 있는 여신님의 마음은 여리게 보였다. 근데 그게 더 매력적인 걸! 아아, 사랑스러워라. 당신은 내 것이 된 지금조차도 나는 당신이 내 것이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왜 저를... 바라신건가요..."

 "그거야 아름다웠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였습니까.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취해 제 행세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나요."

 "~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지. 그건 오랜만에 얻은 힘에 취한 것이었고."

 "오랜만이요...?"

 ". 여신님이 나한테 '텅텅 비었다'고 말했었잖아. 말 그대로 난 텅텅 비어있었는데 성수로 힘을 얻었지? 근데 그건 여신님을 위한 힘이었어. 나는 오히려 성수에서 힘을 얻은 여신님의 신성한 힘을 쓸 수 있었어."

 "고작 그런 이유로..."

 "게다가 여신님은 안 들렸던 기도들, 내게는 다 들렸었으니까. 악마는 좋은 기도 나쁜 기도 안 가린다고? 그래서 여신님 대신 내가 모습 바꾼 거였다고. 신의 신성한 힘을 쓰면 모든 기도들을 들어줄 수 있잖아?"

 "...그건 함부로 쓰는 힘이 아닙니다. 간절함이 닿아야만 쓸 수 있는..."

 "여신님이라면 성당을 가도 안 들릴 건 안 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

 내 말에 여신님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욕망이 앞섰다는 걸 알고도 왜 가만히만 계시는 건지. 설마 죄책감 같은 걸 느끼시는 걸까? 하하, 그건 너무 우스운데?

 "후회하고 있어도 계약을 무를 수는 없어."

 "계약은... 절대적임을 압니다."

 "! 잘 알고 있네!"

 "악마..."

 "여신님, 내 이름 오소마츠인데, 그렇게 불러주면 안될까?"

 이름 없이 계약을 한 상태는 사실 엄청 불안전한 상태이다. 이름을 알면 서로에게 각인이 되어 몸까지도 전부 갖게 되는데, 이름을 안 불렀으니 아직 여신님의 영혼만 내 것인 거다. 몸까지 한 번에 갖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손잡는 걸로 계약하는 거에 이름까지 넣었다면 바로 계약이란 거 들켰을 테니까. 다 된 밥에 재 뿌려서 계약 무르는 것보다 이름 안 부르는 게 낫지. 어차피 이름 정도는 나중에 알려도 괜찮겠지 싶었다.

 쵸로마츠. 당신에게 반한 이래 그리도 아껴 부르려고 쟁여두었던 당신의 이름.

 당신 없이 살아가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젠 당신도 나 없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아하하, 이런 결말을 얼마나 바라왔는지! 나도 당신도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이 상황을!

 "...제 이름은 아시나요."

 "물론이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인데!"

 "...어리석으시군요."

 "차마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표현해줄래?"

 "말 같잖은..."

 나는 그저 씨익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의 방어였으니까. 아아, 이젠 무를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어.

 "약속할게. 신뢰가 없는 일방적인 약속이지만, 여신님을 위해 약속할게. 내가 여신님에게 빌려 쓰는 이 힘은 이제 절대 나쁜 곳에 쓰지 않아."

 "믿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켜보기는 하죠." "이제 평생 지켜봐야 하는데 무슨 걱정이람?"

 "그런가요..."

 씁쓸한 미소가 걸린 저 낯빛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내가 역시 잘못된 걸까? 아냐, 이건 당연한 거다. 지독한 콩깍지가 쓰인 나에겐 당연한 것이다. 당신이 나를 바라본다. 아아,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눈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부르려고 저 작은 입이 나를 위해 사랑스럽게 달싹인다.

 "오소마츠."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황홀감에 젖어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 사랑해 나의 쵸로마츠."

 

[1차 연성] 白夜

 

 

 

# 1.

 

 첫 기억은 눈물도 흘리지 않던 부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모습조차도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그 손에 이끌려 돈이 많다던 그 커다란 집에 도착한 것은 잊혀 지질 않는다.

 ‘사랑한단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작은 나를 꼭 껴안고 나서는 도망치듯 커다란 집에 나를 두고 떠났다. 그 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이름이 없던 것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이름도 참 내키는 대로 불러댔으니 그 땐 전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남자 아이만 이름이 있고 여자 아이는 이름이 없다고, 오라비는 멋진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커다란 집에 오게 된 것도 다 오라비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라비 장가갈 날은 다가오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는 나를 커다란 집에 팔아 넘겼다. 부잣집이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주인집 양반이 나이도 찼는데 혼인을 안 한다는 둥의 소문이 안 좋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안 좋은들 돈이 필요하니 딸까지 팔아버리는 인간들의 양심이란,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름이 무엇이느냐.”

 “이름이 없사옵니다.”

 “이름이 없으면 무엇이라 불렸느냐.”

 “봄에는 꽃분이요, 여름에는 점순이라 불렸고, 가을에는 낙랑이라, 겨울에는 설령이라 불렸사옵니다.”

 

 이름이 없어 보이는 대로 불렸다는 것을 참 시적으로 말하고 나니, 8살이 말하기에는 참 덤덤히도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8살답지 않게 칭얼거리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으며 그저 차분하고 어떻게 보면 어른스러운. 약간의 흑역사도 곁들여지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붙여줘도 괜찮겠느냐.”

 

 나를 보며 묻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 발에 맞추어 서 있자 무릎을 굽혀 내게 눈을 맞춘다. 동의를 얻는 듯 한 당신의 묘한 눈빛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리에 손을 대고는 당신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 ‘백야(白夜)’이니라.”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자 나의 검었던 머리는 흰색으로 물들었다. 희고도 하얀 머리와 빛을 못 봐 그을리지 못한 피부는 환상의 조합이라도 되는 마냥 나를 투명하게도 빛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하얀 머리와 하얀 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2.

 

 “나으리, 소녀 혼인시켜주시어요.”

 

 돈이 권력인 것은 그 시대에도 당연했다. 돈으로 벼슬을 사는 시대도 있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돈을 아끼는가. 내게 나으리라고 부르라 하던 당신도 그 돈으로 나를 공부시켰다. 서당을 다니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반대로 스승을 집으로 불렀다. 공부 좀 했다는 스승도 처음엔 나를 성별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거부하려 들었지만 돈은 많이 주니 일단 가르쳐보았는데 사내보다 영특하다며 나중에는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었다더라. 그 말에 우리 나으리 한사코 거절했다지만.

 

 “혼인...이라 하였느냐.”

 

 공부하던 어느 날, 스승이 내게 물었다. 시집은 언제 가겠냐고.

 시집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리 자각시켜주니 문득 내 나이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 이팔청춘마저도 넘긴 소녀 나이를 보시어요.”

 

 나으리에게 온 것이 8살 때. 그리고 나으리 밑에서 산지 어언 10.

 그 당시 내 나이 18.

 그 때 나으리의 당황하고도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내는 있고 말하는 것이냐.”

 “... 그것은 없으나, 그래도 혼기 찬 여인이 혼자 사는 것도 문제라 들었사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혼인시켜 달랬으니 우리 나으리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내도 없으며 어찌 혼인을 시켜 달라 한 것인지, 혼인을 할 돈은 있는지, 혼인을 한 뒤의 계획도 있는지 등등. 물론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혼이 전부 털렸다.

 

 “그래도... 소녀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시지 않으시어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거야 나으리도 혼인을 하실 게고, 저도 혼인을 시켜 주실 게고... 어찌 되었든 소녀를 죽을 때까진 데리고 있으실 생각은 없으실 거 아니어요.”

 

 아무리 돈을 주고 사왔다 한들 노예보단 양딸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에 나으리도 딸의 혼인 정도야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 알았다. 물론 우리 나으리가 오랜 세월동안 혼인 안 했다고 말은 많았으나, 나으리 정도의 미모이면 그 아무리 40살이라 한들 누구든 혼인 하겠다 줄을 설 정도였다. 게다가 설마 나와 혼인하고자 나를 사왔을까. 나으리의 행동을 10년간 봐왔기에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나으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

 “무엇보다 넌 인간도 아니지 않느냐.”

 

 나으리는 나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셨다. 그리고 나으리는 내게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생각을 그만두었다. 저것은 그저 나으리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단순한 사고가 참 우스웠다.

 와하하,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내가 너에게 이름을 준 날부터 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 보아라.”

 

 나으리는 내게 보아라, 명하셨고 나는 그저 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으리 뒤쪽으로 무언가 하얗고 커다란 게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꼬리를 닮았사온데... 그것이 무엇이어요? 나으리 뒤에 짐승이라도 있으시어요?”

 “이것은 내 꼬리이다.”

 “...?”

 “나는 본디 인간이 아니라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九尾狐)란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나의 뒤쪽을 만져보았다. 무언가 만져지자 그것을 잡아 크기를 가늠하였는데, 그것은 작고 따뜻하고 복슬복슬하며 자신만의 자아가 있는 듯 내 손에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것에 대해 이질감이 들어 그것을 확 놓고 말았다. 누군가 내 뒤에 작은 강아지가 꼭 붙어 안 떨어지는 것이라 말해주었음 할 정도로,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나으리...”

 “10년 간 그 정도의 꼬리가 자란 것이니라.”

 “하지만 소녀는... 전혀 몰랐는데...”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네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꼬리도 안 보일 것이니라.”

 

 인생 18년 째, 처음으로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 뒤로부터 모든 행동에 심혈을 기울여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거 잊어도 애초에 여우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기 무방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안 후 부터 나의 혼인 이야기는 쏘옥 들어갔다.

 

 “어찌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닌 영물이래도 달아나지 않느냐.”

 “달아나서 소녀에게 득 되는 것은 무엇이 있사옵니까.”

 “어딘가로 달아나 구미호가 된 것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럼 무엇 하옵니까. 10년이 지나도 나으리께선 변한 것이 하나 없는데 소녀라고 오죽 하겠나이까. 그리고 이미 팔려 온 몸, 나으리가 거두어주셔서 감사하온데 어딜 가서 또 간사히 몸을 챙긴단 말이옵니까.”

 

 구미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나으리는 이제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공부를 한 덕인지 나으리 곁에 있는 것이 훨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내가 달아나서 무엇하리오. 나는 그렇게 나으리 곁에서 구미호의 삶으로 더 살게 되었다.

 

 

 

# 3.

 

 200년이 지났다.

 구미호로 산 지 어언 200. , 시간 참...

 

 “빠른 거여요?”

 “무엇이 말이냐.”

 “200년이란 시간 말이어요.”

 “빠른 것이라 느끼느냐.”

 “어림조차 못 하겠사와요. 나으리는 어떠신지요?”

 “내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느니라.”

  

 나으리의 말에 나는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꼬리 하나에 100년을 산다는데 이 900년 하고도 나와 200년을 더 사신 나으리온데. 1100년 이란 세월은 정말 어림할 수가 없었다.

 200년 간 외모가 바뀌지 않았다. 겨우 100년에 한 살 먹는 속도로 성장이 늦어지는 기분이었다. 고로 나는 인간 나이로 20살 쯤. 다들 혼인하고 아이 낳을 때 나는 200년을 살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아무렇지 않는 것이.

 한 곳에 약 20년을 머물다가 거처를 옮긴다. 빠르면 10, 좀 괜찮으면 25. 그러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노년층이 있다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웃어넘긴다. 그것이 다였다. 처량하다. 본인을 본인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남을 부르듯 웃어넘기고.

 

 “나으리는, 인간이 되고 싶사옵니까?”

 “...어떤 여우는 그리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여우 말고, 나으리 말이어요.”

 “...나도 되고 싶었다.”

 “왜요?”

 “긴 삶을 사는 건 너무나 혹독한 일인 것을 알았으니.”

 

 100년도 안 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라고 하니 당연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당신은 버티기 힘들었겠지. 꼬리하나가 자랄 때 쯔음 이미 다른 이들은 사라지고 없으니까. 나를 거두어주신 당신은 참 정에 약한 여우였다. 더 인간다웠다. 인간이 되고 싶던 이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시온지.”

 “지금은, 그러려니 살고 있다. 너도 있고.”

 “...그럼 소녀를 구미호로 만드신 이유는 소녀를 나으리 곁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사옵니까?”

 “...비슷한 명분이라 일러두겠느니라.”

 

 200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었는데도 난 아직 나으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 많은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왜 나으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까. 차암, 이리 아버님 같은 분을 나는 그리 오래도 따랐다. 마치 숨기시는 게 많은 아버님 같은, 그런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숨기려고만 한다.

 

 “소녀도 인간이 될 수 있사옵니까?”

 “그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허지만 인간을 여우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로 여우도 인간으로...”

 “나도 그리 인간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

 

 구미호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구미호가 되는 일은 내가 처음이지만,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거듭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이지?

 본래 인간이 구미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구미호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 4.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자 하니 나으리가 안계셨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일이 요즘 잦아지셔서 오늘도 그러시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변수가 좀 있는 날이었다.

 

 “, 자네 있는가?”

 

 누군가를 찾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왔다. 그 손님이 누군지 모르고 누구를 찾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누구시어요?”

 “자네는 누구인가?”

 “...소녀는 백야라 하온데...”

 “나는 린이라 하네.”

 “그래서 누구시어요...?”

 “그건 내 나중에 알려주겠네.”

 

 그는 참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갓을 쓰고 훤칠하게 생긴 사내는 나보다 키가 컸기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연, 있는가?”

 “...? 혹 나으리 말하시어요?”

 “나으리, 라 부르는가?”

 “. 그리 부르옵니다.”

 

 그러고 보니 나으리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으리의 이름은 인가. 처음 듣는 나으리의 이름이었다. 헌데 나으리는.

 

 “나으리는 지금 집을 비우신 상태이옵니다.”

 “집에 없는가?”

 “.”

 “흐음.”

 

 그는 자신의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 .”

 

 손님은 나으리의 친구일까. 나는 그가 들어오자 부엌으로 가서 마실 것을 내어왔다.

 

 “드시어요.”

 “고맙네, 그래.”

 “나으리는 어인일로 찾으시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 내 오랜 친구가 보고 싶어서.”

 “..., 그런데 나으리는...”

 “나는 연의 오랜 친구인 기린이라네. 자네는 구미호인가?”

 “.... 구미호이옵니다.”

 

 나으리의 친구라는 그는 해태같이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기린이었다.

 

 “연은 언제 오는가?”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근래에 일찍 나가시어 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잦으시긴 하온데...”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 ...”

 

 무언가를 아는 듯이 다시 턱을 쓰다듬는 그 분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찰나 내게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나와 친구하겠는가?”

 “?”

 “나는 그리 연과 친구를 하게 되었다네. 나이는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을게야.”

 “하지만 나으리 친구분이시면...”

 “괜찮네. 우리는 어차피 불멸의 존재이니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나와 친구하세. 백야였는가?”

 “.... ‘백야가 소녀의 이름이옵니다.”

 “말 놓으세. 편히 부르게나.”

 “...그리 하도록 노력해 볼 테니 재촉 좀 하지 마시게나...”

 “허허, 알겠네 알겠어.”

 

 나으리가 집을 일찍 나가신 날, 나는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었다. 하지만 나으리처럼 계속 같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만날까 말까할 정도였다.

 어쩌다 만나면 참 기뻤다. 왜냐면 그 날 나으리가 나가시고 전혀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쭉 혼자였기에 어쩌다 그를 만날 때마다 참 기뻤고 혹여 나으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도 나으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시겠지, 그리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산지 몇 년이 지났던가.

 

 

 

# 5.

 

 “몇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이 흘렀지.”

 

 때는 한 여름. 나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 내 앞에 있는 빈자리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지내었는가?”

 “보시다시피? 너는 어때.”

 “나도 보시다시피 지내내.”

 

 내가 어디를 가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내었다. 그건 우리 나으리 때부터 그랬다던데. 떠돌이 생을 사는 그라지만, 그도 어쩌면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마실래?”

 “시원한 커피로 부탁하네.”

 “내가 사는 거야?”

 “그러려고 내게 물은 거 아닌가?”

 “맞아, 사줄게.”

 

 나는 피싯-, 웃고는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주었다. 같이 지낼 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게 몸에 배었다고 해야 할까. 그 옛날에도 돈이 많았지만 쓰는 법을 잘 몰라 가만히 두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쓰고 있다.

 

 “요즘은 어찌 지내는가?”

 “요즘은, 친구들이 생겼어.”

 “나 같은 친구들이 말인가?”

 “. 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나만큼 오래 살 친구들.”

 “오호, 어찌 만났나?”

 “살 곳을 정하다가. 하숙집이라 길래 처음엔 꺼려졌었는데 그 집주인이 내 정체를 그냥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만나게 됐지.”

 “그래서 재밌는가?”

 “당연하지.”

 

 그를 위해 시켰던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는지 진동 벨이 울렸다. 그에게 벨을 쥐어주며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으리는, 아직도 못 만났어?”

 “? 으응, 아직도 못 만났네.”

 “...어디서 잘 살고 계실까?”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 믿게나. 연이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

 “하지만 나한테 말없이 가실 분이 아닌데...”

 

 약 200년 같이 살았지만 그리 믿음이 없으신 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세월에 무뎌져 그의 말대로 어디서 잘 계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너도 하숙집에서 살 생각 없어? 방은 집주인이 만들어 줄 텐데.”

 “미안하지만 난 떠돌아다니는 게 더 즐겁네. 어디 발 묶여 있는 건 질색이라네.”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 권유할 생각은 없지만.”

 “그거면 됐지 또 무얼 바람세.”

 “그냥. 시간 날 때 나 만나러 와주는 거.”

 “그거라면 언제든 그래줌세.”

 “또 나으리 이야기도 해주고.”

 “거거, 연의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나.”

 “700년은 더 들을 수 있어.”

 “벌써 그만큼 세월이 지났나?”

 “. 벌써 꼬리 아홉 개인걸.”

 “차암, 처음에 만났을 땐 겨우 두 개밖에 안되지 않았나.”

 “세월 가는 대로 산 거 뿐이지, .”

 

 말을 편하게 주고받는 이 관계가 참 편하디 편했다. 오랜 친구라 그렇겠지. 이제 내게도 오래 될 친구들이 생겼으니 외로울 일은 없겠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은 지 오래 되어서 그 감각이 무뎌졌지만, 다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난 가보겠네. 커피 잘 마셨네.”

 “, 잘 가고. 백 년 안에는 보자.”

 “그럼세. 잘 있게나.”

 

 그가 가고 나자 나도 내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나를 반겨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아,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 사가야겠다.

 

 “이쁜이들, 보고 싶다!”

 

 

 

# 0.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나와 같이 지내려는 누군가가 없었다. 같은 구미호래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따르려하지 않았고, 인간과 같이 사려니 내가 너무 오래 산다. 이별을 겪기엔 너무 많은 이별을 겪을 거 같기에. 그런 아픔을 갖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구미호는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할까. 오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또 무엇이고.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이 구미호로 될 수 있을까?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구미호의 기를 인간에게 주면 그 인간은 구미호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구미호가 되고 싶다고 할까. 게다가 아직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게다가 그런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인 마냥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긴 세월을 외로이 지내는 것보다 누군가와 부대끼는 짧은 삶이 편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간이 되거나, 누군가 긴 세월을 함께 할 이를 찾거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스르려는 내가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상의 이치가 낮과 밤으로 나뉜다면, 그 이치를 깨끼 위해 살아가는 나는 모순인가.”

 

 구미호는 오래 살기에 인간과 함께 살면 안 된다. 그들의 이치와 우리의 이치는 다르기에 그들은 우리를 그저 요물로 보고 처단하려 든다. 그래서 우리는 숲속에 숨거나 인간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본 모습을 들키지 않게 살아야 했다. 세상이라는 빛에 우리는 타들어가지 않게 어둠 속에 숨어 살아왔다.

 언제까지 어둠에 있어야 하는가. 언제쯤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을까. 구미호가 인간이 되면? 아니면 인간을 구미호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면?

 

 “하얀 밤...”

 

 그 밤을 보고 싶다. 어두워도 어둡지 않고 낮의 빛으로 같이 물든 그런 밤. 해가지지 않아 세상 만물이 보이는 그런 아름다운 밤.

더 이상 우리들도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

 

 “내 언젠간 그 밤을 보리라.”

 

 그 밤을 보고 그 밤을 곁에 두어 내 한생 끝날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두리라. 그리고 이 생명 끝날 때 쯤, 나는.

 

 

-

 

 

 툭-

 상가 길을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예전이었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생각과 다르게 휘청거린다. 곧 넘어질 거 같다. 하지만 부딪힌 상대가 내 팔을 부드러이 잡아주었다.

 

 “고맙네...”

 “괜찮사옵니까? 소녀가 부딪힌 것이어요. 소녀가 잘못했사옵니다.”

 “나는 괜찮네...”

  

 익숙한 목소리. 나는 상대를 알아보았지만 아마 상대는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날 알아보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있다.

 

 “소녀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어도 괜찮사와요?”

 “괜찮네. 혼자 갈 수 있네.”

 

 참, 변한 것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하얀 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자신이 하얗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이리도 아름다운 빛을 큰 전모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도 보고 싶었던 하얀 밤조차도 아직도 어둠 속에 있으니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서 가보게나.”

 “. 어르신도 살펴 가시어요.”

 

 상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를 지나쳤다. 나는 나이에 맞겠거니 싶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대로 헤어지면 좋겠건만.

 

 “연어르신!”

 

 누군가 내 옛 이름을 불러 날 세우는 게 아닌가. 날 부른 이는 내가 가르치는 제자 중 한명이었다.

 

 “그건 옛 이름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직접 지은 호로 불러주게.”

 “, 죄송합니다. 흑주(黑晝)어르신. 여쭙고 싶은 게 있어 모습을 보이실 때 급히 불렀습니다.”

 “괜찮네. 무엇을 물으러 왔는가.”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얀 밤이 지나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얀 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하얀 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얀 밤 또한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나는 집을 나갔다. 하얀 밤이 자신의 정체에 적응이 될 때 쯤, 내가 점점 인간이 되어갈 때 쯤, 내가 사라져도 나대신 모든 것을 잘 짊어지고 갈 수 있으리라 확신이 설 때 쯤 나는 그리 나갔다.

 그리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0년 전 집을 나온 이래 난 내 지혜로 인간들을 가르치며 살아갔다.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그들과 같이 부대끼며. 내가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부터 나는 내 본 이름에 검은 낮이라 호를 붙였다.

 ‘흑주 백연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이 있다면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낮도 있으리라. 대낮에 당당히 거리를 거니는 어둠. 빛을 받아도 그 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 어둠을 그리 칭하리라.


[#魔女集会で会いましょうby 나쵸] 어느 마녀의 이야기 - 너와의 사계절



 옛날 옛날  어느 숲 깊은 곳에, 늙지도 죽지도 않는 저주에 걸린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녀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연현상부터 그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까지, 마녀는 모든 현상과 신비한 힘을 깨우쳐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녀는 자신이 신비한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힘은  누군가의 나이를 나눠줄 수 있는 마법의 힘이었습니다. 마녀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필요한 희귀초를 많이 얻고 싶었을 때였습니다. 다 자란 희귀초와 희귀초의 씨앗을 두고 마법을 쓰면 다 자란 희귀초는 덜 자란 상태가 되고 씨앗은 새싹이 돋아나 빠른 시간 안에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식으로 마녀는 짧은 시간안에 많은 약초를 얻어 더 많은 것을 알아갔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마법을 더 많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생물에게 마법을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다 자란 식물의 나이를 빼앗아 다른 식물의 나이를 늘려도 보고 늙은 동물은 젊게, 어린 동물은 늙게도 만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이를 늘린 식물은 눈깜짝할 사이에 말라 비틀어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바꾼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빠른시간에 나이를 먹은 동물들은 걷는 법, 사냥하는 법, 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해 생태계에서 살아남지 못해 죽고, 나이가 줄어든 동물들은 결국 다시 나이를 먹고 죽었습니다.

 마녀는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떠한 생명을 자신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게 만들어보기 위해서 자신의 마법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한 생물을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하려면, 다른 생물들은 끊임없이 일찍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녀는 한 생물에게서 뺏은 나이를 자신이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멀쩡할줄만 알았습니다.

 그 마법을 쓰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 살아온지도 오랜 세월, 어느 날 마녀는 또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게 내 손에 닿았던가?'
 평소에 닿지 않던 선반이 손에 닿자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몸이 '성장'하고 있던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나이가 자신을 '성장'시킴을 깨우쳤습니다. 늙지도 죽지도 않은 자신이 '성장'했다는 건 자신도 언젠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나도, 내 힘도 결국 자연의 섭리는 못 거스르나보네..."

 마녀는 그 뒤로 더 이상 마법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다시 마녀 혼자 삽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 겨울

 차갑다. 원래 이리도 차가운 곳이었나. 몇 십년 전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이젠 네가 없으니 내 집이 이리도 차가운 곳인가 싶다. 그래도 나는 나가야 한다. 오늘도 필요한 약초를 캐야하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었다.
 너를 처음만난 곳은 바로 이 현관이었다.

 응애- 응애-
 추운 어느 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처음엔 환청인줄 알았다. 춥기도 춥고 어느 길은 미끄럽기도 해서 이 겨울 날 현관을 열기 싫었는데 고양이도 냐옹거리며 현관문을 벅벅 긁는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보니 그곳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네가 있었다.
 "뭐야 이거?"
 너를 보기 위해 쭈그려 앉아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너말고도 쪽지도 함께 있었다.
 "음... 잘 안보이네... 노안이 왔나... '아기를 잘 부탁드립니다'...겠지? 아기는 처음 키워본단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쪽지와 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를 어쩐다 싶었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굉장히 멀기도 했고, 이 추운 날 딱히 마을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추운데 여기 둘 수도 없고."
 그렇게 나는 어린 너를 안아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나와 너의 첫 만남이었다.


# 봄

 현관을 나와 내가 자주 약초를 캐는 들로 나왔다. 이곳은 여러 약초가 있지만 여러 식물도 많았다. 그 중에는 키 큰 식물들이 무더기로 자란 곳도 있는 데 나는 그곳을 기피한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하면 그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녀님은 왜 키가 안 커요?"
 말도 못하던 아기가 십년도 안 됐는데 벌써 나만큼이나 키가 커졌다.
 "그건 불로불사라서 그래."
 "그게 뭐에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나는 키가 작다. 그건 이 어린 모습으로 죽지않고 살아가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럼 나이를 안 먹어요?"
 "...아니, 먹을 수는 있어."
 "어떻게요?"
 "다른 것의 나이를 가져오면."
 "나이를 가져와요? 어떻게요?"
 "내 힘을 사용하면 가능하지."
 "그럼 가져오면 되지 않아요?"
 너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힘을 안 쓰는 이유를 이해하기에는 이 아이가 아직도 어렸기에. 그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난 이대로가 좋으니 너나 많이 먹으렴."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너는 입을 삐죽 내민다. 그것 조차도 성장하는 널 보는 즐거움인가 생각하련다.


# 여름

 약초를 캐는 곳 옆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너는 그곳을 유독 좋아했는데, 이곳에 온 김에 한 번 가보도록 할까. 내가 그곳에 가면 너는 꽃을 따는 뒷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줄것만 같았다.

 "나도 너처럼 커지고 싶게, 왜 그렇게 커진거야?"
 인간은 참 신기하다. 고작 20년 밖에 안 지났는데 나보다 한참 작았던 아기가 저렇게 커지다니.
 "불로불사잖아요~"
 내게 웃으며 말하는 너는 내게 꽃다발을 내민다.
 "오늘 꽃이요."
 나는 뾰루퉁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네가 건내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아-, 향기 좋다.
 "거기서 꺾어온거야?"
 "네, 여름이라 그런지 꽃이 많이 피었더라고요."
 나는 꽃을 화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곤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꺾어 온 것만으로 이미 죽었을텐데, 물에 담그면 다시 살아나는 건 참 신기한거 같아."
 "그런가요?"
 "응, 나는 죽었다 살아나게 하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거든."
 "그럼 나이를 나눠주는 마법은 어때요?"
 "...그건 안 쓸거야."
 "그래요?"
 "응,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거든."
 화병에 담긴 꽃을 톡톡 건드려본다. 생기를 머금은 꽃이 시들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이번엔 너에게 다가가 톡톡 건드려본다. 내 키에 맞춰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싱긋 웃는 모습으로 내게 짧게 묻는다.
 "왜요?"
 "아니 그냥."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나의 말을 받아 듣는 너.
 "다음에 꽃 꺾으러 갈 땐 같이 가자고."
 "네, 그러도록 해요~"
 그 어려운 것을 이해할만큼 훌쩍 커버린 네가 참 대견스럽다.


# 가을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이름모를 들꽃이라도 몇몇개의 꽃은 이름을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코스모스이다. 보라색 자주색  분홍색 하얀색의 코스모스 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는.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너를 보고는 너의 손을 잡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쓴다면...
 "마법은 안돼요..."
 너는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힘겹게 입을 연다.
 "...하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저에게 예전에 그 말을 하셨던거 기억나요?"
 너의 말에 작게 끄덕였다. 난 나의 마법을 스스로 안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주었고, 너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그 나이에서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키셔야 돼요. 당신의 선택에 예외를 두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저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렵니다... 부디 당신이 제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나날이 힘이 없어지는 너를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야 있었다. 너를 위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 나의 최선은 네가 내 곁에서 더 머물 수 있게 약을 지어주는 것뿐,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네가 힘겹게 잡은 내 손 위로 힘없이 손이 풀리던 날, 나는 너를 위해 해준 것이 없어 그저 그 손을 꼭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요."
 내게 마지막까지 웃으며 말해주던 그 한마디가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해 눈을 감았다.


# 또 다시 겨울

 꽃길을 따라 그 끝으로 가면 그 어떤 꽃들도 없는 곳에 닿는다. 꽃이 없는 그 가운데에 오똑이 서있는 하나의 비석. 나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이곳만이 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역시 너랑 살지 말걸 그랬다... 나한테는 너무 짧은 시간이야,  너랑 보낸 시간들은..."
 이곳만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내뱉으며 너를 향해 울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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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원맥강림/조각글] 연애고민상담전화 중

 

 

 

<사랑하는 애인에게 편히 주무시라고 베개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제가 곤란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고민을 들어주시겠습니까> ; 상담게시판에서 발췌



 예, 상담으로 전화 돌렸습니다. 말씀해주세요.

 아, 연애고민이시지요? 네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애인분께 잠 잘 때 좋다는 베개를 하나 사드렸더니 애인분이 베개를 놓지 않는다는 건가요...?

 밤...에 말씀이신가요. 아... 예예... 안고 싶은데 베개가... 그러시군요.

 어찌하시면 좋을지는... 음...베개를 치우시거나 아니면 직접 말씀을 드리시는게...

 ...직접 말씀 드리기 어렵다고요. 애인이 좋아하는 걸 치우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말씀을 드려야...

 아 저, 고객님...? 저는 고민상담을 듣는 상담원이지 고객님의 애인 자랑을 들으려 하는게 아닙니다만...

 ...아 예예, 안고 자는 걸 보면 이 세상을 다 갖은 느낌이 들고... 예... 애인분을 정말 사랑하시나 보군요...

 그리 좋아하시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무엇을 하고 싶으시다면 작은 애교를 부려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애교를 해보신 적이 없나요? 하긴 목소리가 애교 목소리는 아니신...아뇨, 아닙니다. 뭐, 애교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약간의 질투유발도 애교로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

 억지로 코맹맹이소리 같은건 하지 마시고, 베개가 얼마나 좋은지 여쭤보세요. 뭐, 베개가 좋은지 고객님이 좋은지 정도의 질문만이라도 좋을 거 같아요.

 예, 그 질문의 대답이라도 들으면 될거 같아요. 고객님이 좋다면 그 뒤로 고객님이 하시고 싶은 거 하시면 되고, 베개가 좋다고 하면 어떤 짓을 하시던 고객님을 선택하게 하세요. 뭐... 집을 나간다던지, 헤어지자던지...

 아... 죄송합니다. 그냥 협박아닌 협박을 하라고 말씀드린건데 말이 좀 험했네요. 그것보단 순화시켜서 말하세요...

 네? 둘 다라고 말하면 어떡하냐고요? 그럼 무조건 하나만 선택하라 하셔야죠.

 예 그러면 될거 같습니다. 그리고 대답에 따라 진솔함도 표현하세요. 서운했다던가 슬펐다던가... 무엇이든 표현하시면 애인분이 좋아하실 거 같아요.

 네, 도움이 된거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애인분과 좋은 밤 되시길 바랄게요. 네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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