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학오소×쵸로스케] 은혜 갚은 학

 

 

 

 

 “혼인 하지 않겠느냐.”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소리만 10년째인 건 아느냐. 하기 싫으면 그냥 하기 싫다고 말해라.”

 싫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말하진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꼿꼿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가 보거라, 한숨과 함께 나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말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 때를 잊을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게 잊을 수 없는 그 때는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이 나의 14살 때로부터 시작된다.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의범절을 배워온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꽃꽂이를 배워왔었다. 풍류를 즐길 취미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내가 선택한 것은 꽃꽂이였다. 다른 취미도 있었겠지만, 나는 실물을 두고 바라보는 것이 그 어린 시절부터 참 좋았다.

 색색의 꽃 중에서 가장 눈을 끌었던 색은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분홍색이었다. 이 색들의 조합은 그 어릴 적에도 지금에도 참 재미있었다. 마치 꽃들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거 같아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꽃꽂이란 일이 얌전히 앉아서 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빙긋 지어지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도련님은 정말 꽃꽂이를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그래 보이나요?”

 “꽃들에게 생기가 보이잖습니까. 정말 아름다워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보며 칭찬을 해주었고, 나는 꽃꽂이를 취미로 삼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련님다운 취미라거나, 사내가 하기엔 너무 조용한 취미가 아니냐는 소리를 주변에서 듣곤 했지만, 나는 그와 별개로 꽃꽂이를 할 때가 가장 마음이 놓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꽃꽂이를 할 때는 꼭 놓여 진 꽃만 해야 하나요?”

 “준비된 꽃으로 하면 편하긴 하죠. 그건 왜 물어보시나요, 도련님?”

 “제가 직접 꽃을 준비해보고 싶어서요.”

 “필요한 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되세요.”

 “물론 그게 더 편하겠지만, 직접 꽃들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여 허락된 공간은 숲 가까운 곳에 있는 넓은 뜰에 놓여있는 화원이 전부였다. 분명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느낌은 없었다. 어쩌면 그 꽃들이 너무 형식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꽃을 보던 그 때의 나는 '항상 보던 꽃'과 화원에 피어진 꽃들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꾸준히 다섯 색깔의 꽃을 준비해서 꽃꽂이를 했다.

 꽃꽂이를 할 때마다 매번 비슷한 꽃들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내며 무의식적으로 진부함을 느끼고 있었던 때, 내 발걸음은 화원이 아닌 그보다 더 넓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다. 가본 적 없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숲 속,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할아버지가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던 어느 날, 저 나무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숲 속 그곳은 가본 적 없었고 갈 시도조차 안했던 곳이었다. 애초에 그곳에 가려는 내 마음을 헤아리고 허락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들어간 그곳은 온통 궁금한 것뿐이었고, 그곳에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신비로웠다.

 초록색은 그저 줄기와 잎의 색인 줄 알았는데 이곳엔 차고도 넘칠 만큼의 초록색이 가득했다.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새는 그 틈을 따라 조금씩 발을 들였다. 본적 없는 아름다움이 어린 시절의 눈엔 찬란하고도 신선하게 보였었다. 그리고 곳곳에 보이던 야생화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크고 화려한 꽃들이 아닌 작고 수수한 꽃들. 그것을 하나씩 구경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깊이 깊이 들어갔다.

 “이 꽃 정말 예쁘다...”

 그 깊은 곳에서 보게 된 한 송이의 빨간 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꽃이라 집에 이 꽃을 준비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때문에 직접 가져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 송이를 따고나면 한 걸음, 또 한 송이를 따고나면 또 한 걸음.

 “여기 어디야...?”

 그렇게 한 다발의 꽃을 꺾어올 때까지 걸어갔다. 수많이 따온 꽃만큼 걸어왔으니, 내가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봐도 길을 알 수 없어서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누군가 와줄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나를 누군가 찾으러 와줄까?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말도 없이 나왔으니 알 수가 있을까.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까?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던 햇빛들이 자취를 감추자 그 자리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의 처음 본 숲의 어둠은 점점 두려움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바람에 사르륵 부딪히는 나뭇잎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는 무언가가 나타날 듯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발 걸음소리까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거기 누구 있냐?”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기모노에 하얀 면사포를 쓴 누군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사람이잖아? 그것도 어려 보이는데. 여기서 뭐해?”

 난 그곳에서 그 분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마치 어느 동화의 속 이야기처럼.

 

 

그곳에는 학 한마리가 덫에 걸려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학에게 걸려있는 덫을 풀어주고 학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했지? 일단 나는 길을 아니까 마을입구까지는 같이 가줄 수 있어. 거기까지 가면 길은 알 수 있을 거야. 걸을 수 있겠어?”

 “, 걸을 수 있어요.”

 “,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씩씩한 도련님이네- 포부가 좋아~ 그런데 도련님은 여기 처음 와본 거야?”

 “, 처음이에요...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 난 이 숲의 모든 걸 꿰고 있거든!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는데 초행길이라니, 대단한데? 여기 꽤나 높은 곳인데!”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혹시 손에 들린 그 꽃 때문에?”

 “, ...”

 “꽃 보는 눈이 좋나봐? 그 꽃 정말 예쁘지?”

 “, 꽃꽂이 하면 좋을 거 같아서...”

 “꽃꽂이? 고상한 도련님인가 봐~ 꽃꽂이도 할 줄 알고?”

 “그냥 집 안에 있을 때 취미로 하곤 해요.”

 “재밌어?”

 “저는 재밌어요.”

 “도련님이 재밌으면 됐지~ 나도 꽃꽂이 하는 거 보고 싶다-”

 “저희 집에 놀러 오실래요? 보여드릴 수 있는데.”

 “? - 나 아마 못 갈걸?”

 “? 왜요?”

 “그으-? 글쎄, 사람들이 날 잘 안 반겨주더라고.”

 “그런가요?”

 “으응- 뭐 괜찮아. 난 숲에서 살거든. 그래서 이곳을 훤히 알고 있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즐거운 걸? , 덕분에 길 잃은 도련님도 찾았잖아.”

 “그렇네요...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 사람들 인연이야 얽히고설킨 거라, 도련님이 착하게 살았나보지. 날 만났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 저기 마을 입구가 보여!”

 “벌써요?”

 “으응- 빨리 왔지? 크으- 내가 지름길을 알고 있었거든. 어서 가봐. 도련님의 엄마 아빠가 걱정 많이 하시겠다.”

 “...저 또 와도 돼요?”

 “? 또 길 잃으려고?”

 “아뇨... 꽃꽂이. 꽃꽂이 보여드리러 올게요.”

 “그럴래? , 오늘처럼 깊이만 안 갈 거라고 약속한다면.”

 “약속할게요! 약속의 의미로 이 꽃 드릴게요.”

 “꽤나 낭만적인 도련님이잖아? 좋아, 받아줄게. 그럼 다음에 봐-!”

 

 

그 날 밤, 노부부의 집에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도련님 왔어?”

 왜 그 때의 나는 꽃꽂이를 보여준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 때 헤어지기 싫은 그 마음이 무의식 속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덕분에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종종 숲 속을 놀러갔다.

 “, 저 왔어요. 이건 선물.”

 비밀스러운 만남은 나에게 즐거운 재미가 되었고, 그 분은 나에게 숲의 신비를 하나씩 알려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던 숲은 그리 멀지 않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 화과자네? 나 매일 이렇게 선물만 받아도 되는 거야?”

 “보답하고 싶으면 마을에 와주세요. 함께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으니까.”

 “으음- 무리 무리. 역시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있는 건 좀 힘들단 말이지.”

 나는 그 분의 이름도, 정확히 사는 곳도, 직업도 모르지만 굳이 알아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분이 내게 이름도, 정확히 사는 곳도, 직업도 안 물어본 거처럼. 그런 뒷배경 없이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집에서 어느 가문의 사람을 만나는 것밖에 안하는 내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저는 만나주시잖아요.”

 “도련님이 나한테 꽃 줬잖아.”

 “옛날 일을...”

 “그게 뭐 옛날 일이라고- , 그 때 도련님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그 때보다 도련님 키가 많이 컸네? 아직 나보단 작지만!”

 “많이 컸죠. 앞으로 더 클 거지만.”

 “네네- 무럭무럭 크세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분밖에 없었다.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편해졌고. 잠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됐으며. 그 분과 있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그 분과 있는 이 시간이 멈추어 영원하기를 감히 바라봤다.

 그러나 그 꿈이 헛된 희망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실례지만 하룻밤만 묵을 수 있을까요?” 아리따운 소녀가 물었습니다.

 

 

 “우리 가문에 어울리는 아이다. 이제부터 만나서 정이라도 쌓아보려무나.”

 내가 18살이 되던 해, 내게 한 여인의 사진이 왔었다.

 “이제 숲도 그만 가라. 흙장난하며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느냐.”

 나의 즐거움을 빼앗으려는 아버지가 이렇게 원망스럽게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그곳에 가서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분을 만나는 거만큼은 저지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생각해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왔다. 이미 해가 진 깜깜한 하늘이 보였다. 방으로 돌아갈 발길을 돌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올 줄 알았어.”

 숲에 다다르자 그 분이 그 앞에 서계셨다. 갈 곳이 한 곳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곳에 있어줄 분을 지금 이 시간에 만나게 될 줄이야. 꿈인가? 꿈이 아닌가? 내가 헛것을 보는지 명확히 분간을 못하고 있었을 때, 안심하라는 듯 그 분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셨다.

 “고마워요. 정말 계실 줄 몰랐지만...”

 “나도 올 줄 몰랐네. 하지만 긴말 안 할게. 도련님, 돌아가.”

 “...왜요?”

 “왜긴, 여긴 왜 왔어. , 그 나이에 반항이라도 하는 거야? 이 밤에?”

 “하지만...”

 “돌아갈 마음 있다고 얼른 말해.”

 “...그런 마음 없습니다. 안 돌아갈 거예요.”

 “그럼 이 밤은 어떻게 지내려고.”

 “...재워주세요.”

 “당돌하네, 정말.”

 그 분이 잡은 손을 내가 먼저 놓을 생각이 없었다. 길을 잃지 않을 생각으로, 그 분을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더욱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그 분이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자신이 졌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알았어, 알았어-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나도 혼자 둘 생각은 없으니까. 따라와.”

 그렇게 나는 그 분을 따라 숲 속을 걷게 되었다.

 

 

제가 베를 짜는 밤 동안은 절대 들어오지 말아주세요.”

 

 

여기가 내가 묵는 신사야. 좀 허름하지만 제법 넓어서 방도 많고... 사람들이 쓰던 물건도 있어. 하룻밤 자기는 괜찮을 거야.”

 “, 감사합니다.”

 “난 이 방에서 있을 거니까, ...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알았지?”

 “, 그럴게요.”

 비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잠잘만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 분의 방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필요한 거 있어?”

 “, 있어요.”

 “어떤 거?”

 “당신이요.”

 “? 난 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 괜찮을까요.”

 “... 그 정도야. 잠깐만- 정리할 게 있어서... , 됐다. 이제 들어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분은 이불 위에 앉아계셨다. 내가 들어온 걸 보고 히죽 웃으시더니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셨다. 그곳에 앉으라는 이야기겠지.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그 옆에 앉았다.

 “뭐어- 사람들 사정이야 대충 알고 있어. 곱상한 도련님이 나이 찼겠다, 혼기 찼겠다... 뭐 그런 이유였겠지?”

 “맞아요. 그런 이유입니다.”

 “흐응- , 결혼 싫어?”

 “...싫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본 적도 없는 여인의 사진을 보여줄뿐더러, 더 이상 숲에 가지 말라고 말하셔서...”

 “, 집에 있으면서 더 고상하길 바랐나보네. 도련님은 그게 싫어 뛰쳐나온 거고.”

 “...”

 “근데 왜 숲으로 왔어?”

 “그냥 발걸음이 닿는 곳으로...”

 “닿는 곳으로 갔다면 마을 아무대나가 더 가깝지 않나? 여긴 멀잖아.”

 “그렇지만 저는 여기에 오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왜?”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왜, 나는 이곳에 오고 싶었더라. 숲에 가지 말란 소리를 듣고 반항심에? 내가 기댈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생각에? 아니다. 난 왜 이곳에 오고 싶었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결론 참 재밌네!”

 “보고 싶어 해서 이렇게 왔어요. 그리고 그곳엔 당신이 있었고.”

 “도련님이 올 걸 알았거든. 난 이 숲에 모든 걸 꿰고 있으니까.”

 “모르시는 게 없으셨죠.”

 “그럼- 그리고 지금 도련님 마음속도 훤히 보여.”

 “제 마음이요?”

 “날 좋아하잖아.”

 “?”

 “맞을 텐데? 난 도련님이 날 좋아하는 거. , 도련님은 나랑 있고 싶고, 나랑 있는 게 즐겁고 또 행복하잖아. 날 보고 싶어 하잖아. 그거 사람들 사이에서는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불리는 거 아냐?”

 “...”

 “그런데 도련님이 부정하면 부정되는 감정이니까 무시해도 돼.”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야. 난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과 나누는 감정은 이루어지지 못해.”

 “사람이 아니라고요...?”

 “, ... 설명하면 긴데. 백문이 불여일견. 조금 이따 내 방에 와봐. 그럼 알게 될 거야.”

 

 

노부부는 호기심에 소녀의 방을 열어보았습니다.

 

 

 “어서와.”

 눈앞에서 어서 오라고 인사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눈엔 그저 한 마리의 커다랗고 하얀 학처럼 보였다.

 “어때,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하겠어?”

 “하지만... 하지만...”

 “낮에는 사람으로 둔갑하기가 좀 편해서 그 모습으로 만나고 있었어. 밤에는 힘들고.”

 “...”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니 커다란 학은 날개를 펼쳐 제 몸을 감쌌다가 다시 펼쳐보였다. 그러자 내가 알고 있던 그 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분은 날 보며 씨익- 미소 지어보였다.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도련님. 나도 도련님 많이 좋아했어.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만나는 건 힘들잖아. 이제 숲에도 그만 와. 나도 떠날 거니까.”

 “떠나실 거라고요...?”

 “본 모습 보여주고 좋은 꼴 본 적이 없었거든. 도련님은 사람이니까 사람이랑 사는 게 좋잖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곱상한 도련님으로 살아가면 되잖아.”

 그렇지? 라며 내게 다가온 그 분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고 숲을 모두 꿰고 계시는 분. 그렇기에 이리 들통 난 내 마음은 당신께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도련님이 내게 꽃을 주고, 꽃꽂이도 보여주고, 항상 놀러와 주고, 선물도 줘서 특별히 도련님에게만 내 마음 열어 준거야. 나도 도련님을 이만큼 좋아한다고.”

 그 분이 다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 손을 또 놓지 않고 싶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하지만 아침엔 정말 돌아가야 해. 알았지?”

 “정말 떠나실 건가요...?”

 “. 도련님이 마을에 가는 거 보고 갈 생각이야.”

 “제가 보고 싶다고 해도요?”

 “말했잖아, 사람은 사람이랑 사는 게 좋다고. 그러니 사람 아닌 나는 그냥 우정으로 남겨두고 좋은 추억으로 생각해. 알았지?”

 당신이 지어주는 미소가 내 마음에 새겨지고 있는데 그걸 그저 남겨두라니, 이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요?”

 “글쎄, 내가 다시 온다면야 만날 수 있겠지? 근데 내가 올 때까지 도련님이 있을 수 있을까?”

 “기다릴게요.”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얼마가 걸리든 기다릴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이 손을 놓으면 바로 날아가실 거 같아서 밤새 손을 잡았던 거 같다. 이 밤은 어디 안 간다며 날 다독거려 주셨는데, 그 손길이 여전히 선하게 느껴졌다.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감히 바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해가 뜬 아침에 그 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자신이 학인 걸 들킨 소녀는 지금까지 짜놓은 베를 놔두고 집을 떠났습니다.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말만 하며 혼사를 파기한 것이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아직 서른 전의 나이라 아버지는 계속 나를 설득하시려고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내가 좋아하는 그 분을 잊을 수가 없어서 혼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참 대단하지, 고집을 안 꺾으시는 아버지도, 여전히 일편단심인 나도.

 “...추워.”

 가 보거라, 한숨과 함께 나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말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오자 급격히 추워진 날씨가 입김을 하얗게 만들었다. 어쩌면 눈이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거 같다. 하지만 추운 건 추운 거니 얼른 방에 들어가서 하다 말은 꽃꽂이를 할 생각이었다.

 “도련님, 방 따뜻하게 데워놨습니다.”

 “고마워요.”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자리에 앉아 꽃을 다듬으며 차 한 잔을 여유로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면 꽃꽂이도 정성스레 되는 법이니까.

 “도련님, 차 가져왔습니다. 밖에 눈이 내리는데 보셨나요?”

 “아까는 오지 않아서 못 봤습니다.”

 “, 지금 내리고 있어요. 그런데 도련님, 저기 마루에 꽃 한 송이가 떨어져 있는 거 같던데 가져다 드릴까요?”

 “옮기는 중에 떨어졌나 보군요. 눈 내리는 것도 볼 겸, 제가 가지러 가겠습니다. 차는 옆에 둬주세요.”

 방밖으로 나와 보니 아까는 내리지 않았던 눈이 정말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춥지만 눈 내리는 걸 보는 건 참 편안한 일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떨어졌다는 꽃을 찾고 있었다. 어떤 꽃이 떨어졌을까.

 “, 저기 있다.”

 꽃잎이 빨간색의 꽃이었다. 덕분에 찾기 쉽다며 꽃을 주우러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꽃이 꽃꽂이 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겨울에 피어날 꽃이 아님도 알 수 있었다. 그 꽃은, 그 빨간 꽃은...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밖을 내다보고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이미 눈밭으로 덮인 길은 하얗게 보였지만, 그곳에 내 눈에 띈 하나의 발자국이 보였다. 사람의 발자국이 아닌 한 마리의 새가 있다간 흔적처럼 남겨진 발자국이었다.

 나는 숲을 바라보았다. 이미 하얗게 덮여버린 산 속에서 하얀 새를 찾기는 어려울 듯 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구해 준 학이 바로 그 소녀였답니다.

'오소마츠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도/19금]  (0) 2020.01.01
[속도] 눈  (0) 2019.12.13
[이치카라/19금/단편] 여행  (0) 2019.04.16
[종교마츠] 당신을 위하여  (0) 2019.03.28
[오소쵸로] 사랑을 하는 너에게 감정이란 선물을.  (0) 2017.08.23

[진우정우/대학생] 감정

 

 

 

 "그거 들었어?"

 "어떤 거?"

 "학교 앞에 카페 있잖아. 거기 새 알바가 왔다는 거!"

 "그래?"

 "가볼까? 그 알바생 무지 잘생겼데!"

 소란스럽다. 강의 시간이 아니면 소란스러움은 진정되지 않은 거 같다. 특히 교양시간은 사람이 더 모여서 더욱... 머리가 아파지면 조용한 곳에 가면 된다. 다음 강의 전까지 시간이 남으니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려고 할 때 쯤 전화가 왔다.

 "연정우!"

 "...뭐야 임청아 왜."

 "톡으로 선물 보냈으니까 즐기고 와!"

 "선물? 뭔 선물."

 "무려 너희 학교 앞에 있는 카페 새 알바생이 잘 생겼다는 제보라고! 그 카페 기프티콘 보냈으니까 알바생 얼굴 좀 보고 와줘~"

 알바생? 뭔 알바생을.. , 그러고 보니 아까 있었던 소란스러움 중에 그런 말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생각을 되짚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벌써 SNS에 다 떴단 말야. 내가 가기엔 조금 머니까 부탁할게! 그럼 나 다음 강의 들어간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전화종료 화면을 바꾸고 선물 줬다는 사촌의 말을 확인해보았다.

 "핫초코랑 초코케이크 기프티콘."

 사촌의 취향이 꾹꾹 담긴 메뉴였지만 만인이 거부안 할 디저트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를 가더라도 소란스러움이 사그라지진 않을 텐데. 그럼 지금은 도서관을 가고 집에 갈 때 쯤 한 번 들리는 건 괜찮겠지. 이왕 선물 받은 것이니 거부할 이유는 없고, 잠깐 그 카페에 들려서 빠르게 포장해서 가도 괜찮을 거 같고...

 

 "월요일도 아닌데 도서관 휴관이라니..."

 가벼웠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생각하다가 기프티콘이 생각났다. 카페... 백색소음으로 오히려 공부가 잘 된다고도 들은 거 같은데.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무거워진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딸랑- 학교 앞에 있는 카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어서 오세요-"

 인사로 시작하는 카운터에는 여자 분이 계셨다. 분명 새로 온 알바생이 잘 생겼다고 했는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가 이 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주문을 시작했다.

 "핫초코 한 잔과 초코케이크 주문 받았습니다. 진동벨 울리면 가지러 와주세요."

 카페를 둘러보아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이랑 간간히 부딪히는 찻잔 소리.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만큼이나 크지 않은 이야기소리. 이 정도를 백색 소음이라고 할까. 도서관보다는 아니지만 책 읽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지이이잉- 책보다가 울린 진동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부스로 갔다. 그곳에서 핫초코와 초코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봤는데, 그 쟁반 위에 마카롱 몇 개가 더 올려 져있었다. , 이건 안 시켰는데?

 "저기, 주문 잘못 받으신 거 같은데..."

 ", 그거 서비스에요."

 서비스라고 말해주는 목소리는 카운터에 있던 여자 분의 목소리와 달리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말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올리자 눈이 마주치는 곳에 익숙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가 서있었다.

 "손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주는 나의 서비스."

 

 "얼마나 있다가 갈 거야?"

 "... 다음 강의가 한 시간 뒤에 있으니까 그 전까진 있을 거 같아."

 "그래? 그럼 30분 뒤에 네 자리로 갈게. 지금은, 갑자기 주문이 많이 들어와 버려서...!"

 ". 천천히 하고 와."

 아까 주문할 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는데, 그럼 그 사이에 온 건가? 만약 그 사이에 왔다면 내가 못 봤을 게 분명하다. 책 읽고 있었을 뿐더러 출입구와 등지고 앉았었으니까. 나는 케이크를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부터 일 한 거지? 전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며 준비 중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알바였을까? 그럼 그거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건가?

 "정우야, 오래 기다렸어?"

 "? ... 왔어?"

 ". 너무 보고 싶어서 주문 받은 거 빨리 끝내고 왔지. 조금 이따가 다시 가야할 거 같지만-"

 네가 내 맞은편에 앉음과 동시에 내 모든 생각이 중단되었다. 계속 생각하는 것보다 너에게 듣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여기 언제부터 일 한 거야?"

 "일 한지는 별로 안 됐어. 아직 배우는 중이라."

 "그래? 그럼 뭐 준비한다고 한 게 알바였어?"

 ", . 알바는 맞긴 한데, 바리스타를 해보고 싶었거든."

 너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바리스타...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전문직. 그것도 너에겐 분명 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정우 놀래켜 주고 싶었단 말이야."

 "뭘 놀래켜 주려고."

 "내가 이 카페에 와서 일하려고 고생 좀 했거든. 왜 이 카페로 왔는지 알아?"

 "?"

 "정우가 다니는 대학교랑 가깝잖아. 여기서 널 기다리고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생글생글 웃는 너의 모습을 바라봤다.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못해서 전보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건 맞지. 그런 이유로 이곳에 와서 나를 보며 웃는 건 조금...

 "정우야."

 "...?"

 "마음껏 공부하고 와도 돼. 나 야간타임 있어서 늦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와. 알았지?"

 "... 그럴게."

 조금... 조금 많이 설렌다.

 

 "그런데 카페엔 왜 왔어? 원래 비어있는 시간엔 도서관가지 않아?"

 "... 오늘 도서관 휴관이더라고. 마침 이 카페 기프티콘을 받게 되어서 온 거 뿐이야."

 "그래? 나 사실 아까 들어오면서 너 봤을 때 많이 놀랐어. 여기에 올 리가 없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나 했지."

 "헛것일리가..."

 ", 진동벨로 확인하기 전까지 정말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볼 수 있고 너무 좋다."

 "... 나도 좋아.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여기 새로 들어왔다는 알바생이 누군지 알아?"

 "알바생? 최근에 들어온 사람은 나뿐인데?"

 "그래? ...소문이 틀린 건 없네."

 "소문? 어떤 소문?"

 "새로 온 알바생이 잘생겼데."

 "?"

 "강의 끝나고 나면 그 얘기로 소란스러워. 기프티콘 준 애도 그 소문 확인해달라고 준 거였거든. 소문은 맞다고 얘기 해줘야겠어."

 "그런 소문이 돌았다고?"

 "몰랐어?"

 ", 난 정우한테 커피 만들어 줄 생각만 했거든. 그러고 보니 여학생들이 더 많아졌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난 잘 모르겠어서."

 "그렇구나... 일 그만둘 생각은 없지?"

 ", 당장은 그만둘 생각 없어. 난 여기가 가장 좋아. 정우도 이렇게 볼 수 있고."

 ", 그건 나도 좋아. 좋은데..."

 "좋은데?"

 "... , 나 강의 시간 다 됐다. 가볼게."

 "? , .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 끝나면 여기로 와."

 "...그럴게."

 너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가야했다. , 생각났을 때 문자해줘야지.

 「 그 카페 알바생 잘생겼더라. 그런데 가지는 마.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거든.

 이 문자를 모든 여대생들에게 보내주고 싶다.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니까 눈독 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카페에 갈 손님들이 조금은 줄어들까. 그러면 나도 카페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

 

 강의가 끝난 뒤에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폈다. 역시 카페보다 조용한 공간이라 생각하던 차에 문자가 왔다. 아마도 강의 전에 보낸 문자의 답이겠지.

 「 이미 임자 있다니! 아 역시... 잘생긴 남자들은 이미 짝이 있나봐!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면전에 대고 물어봤어? 아니면 아는 사람이야?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애인이거든.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답장은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답 안하면 분명 뭐라 하겠지만, 답해서 귀찮은 거나 답 안 해서 귀찮은 건 똑같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귀찮게 또 문자가 왔다.

 「 뭐야! 답을 안 하다니. 그렇다면 선택지에 없다는 말이잖아? ~ 선택지에는 없는데 임자 있는 건 안다? 답은 하나네~ 모르는 사람이지만 임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완전 틀렸거든.

 「 아 잠깐 잠깐. 모르는 사람인데 갑자기 그걸 말할 리가 없잖아. 연정우가 모르는 사람한테 고백했을 리는 없고... 그럼 그 사람이 '나 애인 있어요.'라고 팻말이라도 들고 다니나?!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 팻말을 들고 다니면 SNS에 그게 안 뜰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묻는 걸 들었어? 엿들었어?

 「 아니. 그런 걸 누가 물어.

 「 ? 잘생겼다며. 여자들이 가만히 안 놔둘 텐데? 애인 있냐 번호는 뭐냐 묻는 사람이 하루에 한 두 명은 꼭 있을 걸? 내 초콜릿을 걸게!

 뭐? 뭘 묻는다고?

 「 그나저나 내가 문자 5개 보낼 때 연정우 답장이 하나왔다니! 평소에는 씹으면 계속 씹을 텐데, 하나라도 보낸 거 보니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 걸~ 혹시 그 사람이, 그 질문을 받는 거에 네가 신경 쓰인다면 얼른 가서 지켜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임청아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 편인데...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신경 쓰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누가 묻는다면... 친절하게 성실히 대답할 네 모습이 싫은 게 아니다. 그냥 누가 묻는 거 자체가 싫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가방을 챙겨들고 곧바로 카페로 향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여대생들이. 정신없다. 아까보다 훨씬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거 같은데 그냥 다시 돌아갈까...

 "나보러 왔어?"

 "?"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금세 카운터 앞으로 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의 물음에 눈을 마주쳤다. 아까는 여자 분이 서있었더니 지금 서있는 사람은.

 "나 오늘 일생동안 쓸 행운 다 쓰는 거 아니지?"

 "진우..."

 "? , 주문받아야지. 우리 정우는 뭐 마실래?"

 "...나 그냥 아메리카노."

 "그래? 라떼도 맛있는데. 나중에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너는 내게 함박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진동벨을 주며 좀 이따 갈 테니 앉아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작게 끄덕이고는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운터에서 그리 멀지 않아 네가 잘 보이는 곳에. 개인 독서대를 놓고 노트북도 열어서 시선이 최대한 정면에 닿도록 하였다.

 "... ...?"

 나 지금 뭐하는 짓이지...? 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곳에서 전혀 집중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턱을 괴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누가 너에게 뭔갈 묻는 건 정말 싫을 거 같은데, 내가 그걸 들어서 어떡할 거지. 누가 애인 있냐고 물으면 내가 가서 그 애인이 전데요, 라고 할 건가. 절레절레-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왜 여기에 온 거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진동벨 안 울렸는데?"

 "내가 먼저 가져왔지."

 "...근데 서빙은 원래 안 되지 않아?"

 "너에게 오는 김에 같이 가져온 거야. 휴식 시간도 받아오고 케이크도 가져왔어. 같이 먹자."

 "그래..."

 펼쳐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잠시 접어두고 널 마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오라고 했지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어. 이 시간은 사람 진짜 많거든. 그래서 이 시간에 볼 줄 몰랐는데, 정말 나 보러 온 거 아냐?"

 ". 너 보러 왔어."

 "?"

 네 눈이 빠르게 깜빡거린다. 물음에 대답한 거뿐인데 저렇게 놀랄 일인가?

 "너 보러 온 거 맞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럼 여기서 공부하려고?"

 ". 그러려고."

 아메리카노를 들어 한 입 마셨다. 뜨거웠다. 조금 식히고 마셔야겠네.

 

 "정우야."

 "."

 "나보러 온 건 정말 기쁜데, 너 공부까지 방해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늦게 와도 괜찮아."

 "그래? 그럼 가볼게."

 "...? 이렇게 빨리?"

 "괜찮다며."

 "...찮은데. 지금은 안 괜찮아. 나보러 왔다며. 조금 더 보고가."

 가방을 집으려던 내 손 끝에 네 손이 닿았다. 가지 말라며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반짝이는 거처럼 보였다.

 "그래. 너 퇴근할 때까지 있을 거니까."

 ". ... 나 휴식시간 끝났다. 공부하고 있어-"

 네가 내게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살짝 손 흔들어 주고 시선을 다시 노트북으로 옮겼다. 아메리카노는 조금 식었을까.

 "주문 받겠습니다."

 아까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소란스러움이 많이 잦아들었다. 덕분에 카운터에 서있는 네 목소리가 훨씬 잘 들려왔다.

 "진우야? 안녕! 여기서 일한다고 듣긴 했는데, 학교 말고 이렇게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 안녕. 뭐 마시려고 왔어?"

 "나 딸기 쉐이크랑 치즈 케이크 부탁할게."

 "네네, 주문 받았습니다."

 "근데 진우야."

 "?"

 "너 여자 소개 받을 생각 없어?"

 "없어."

 ", 그러지 말고~ 다른 과에 내 친구 있는데 완전 과여신 소리 듣는다니까? 근데 네가 여기에서 일하는 거 SNS에 뜬 거보고 되게 관심 있다고 했단 말이야. 한 번만 만나봐~ ?"

 "손님, 생각 없다는 사람 그만 설득하시고 여기 알람 울리면 주문하신 거나 받으러 오... 정우야?"

 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고작 한다는 게 저런 말을 듣기 싫어서 도망 나온 게 전부잖아.

 

 카페에서 도망치듯 나와 걷다보니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 내 가방. 가방까지 모두 정리해서 나올 여유가 없었다. 좀 이따... 조금 걷고 후에 진정되면 다시 들어가자. 그럼 될 거다. 그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우야...!"

 들릴 리 없을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살짝 돌아보니 언제 따라온 건지 네 모습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내게 다가온 너에 의해 내 발은 바닥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

 "갑자기 나가니까 걱정되잖아."

 "이렇게 막 나와도 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 그건 중요해. 네가 선택한 네 일이잖아."

 "정우야... 내 일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지만, 난 너를 언제든 선택할 수 없어. 난 그 어느 순간도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

 "일하고 있지만 네가 와줘서 기뻤어. 일하는 중간 중간에 널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근데 갑자기 그렇게 나가니까 너무 걱정되어서... 괜찮아?"

 "...미안."

 고개를 떨군 채 작게 사과를 하자 너는 그 두 팔로 내 몸을 천천히 감싸 안아주었다.

 "정우가 사과할 일 없어. 오히려 내가 해야지. 미안해... 널 안 괜찮게 만들어서... 아까 대화 들은 거지?"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힌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너는 내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걔는 그냥 같은 과 동기일 뿐이야. 저런 식으로 주선하려고 말 붙이고 다녀서 나도 피하려고 해. 아까는 운이 좀 나빴어."

 "...진우야."

 "?"

 "... 일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여자 소개 받겠냐는 말? 나한테는 정우뿐인데?"

 "아니... 그런 말 많이 듣냐고."

 "많이는 아닌데, 가끔 듣긴 해. 근데 나 정말 다 무시하고 있어. 나한텐 너뿐이거든."

 네 말이 진심인 것도 안다. 네 말에 거짓이 없음도 안다.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네가 어떻게 그것을 거부할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내려졌다. 다 알고 있으면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마음이 그걸 원치 않았다.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

 "?"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싫어서 왔었어. 근데 막상 그런 말 듣는 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 안 듣겠다고 뛰쳐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되게 한심하더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는데 난 여전히 네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넌 내 말을 듣고 한참을 토닥거려주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채로 토닥임을 한참 동안 받은 후였나, 네가 나를 불렀다.

 "정우야."

 "...."

 "카페에 가방도 두고 나왔었지? 일단 돌아가자."

 "..."

 네가 손을 꼭 잡고 돌아가는 내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페에 돌아와 보니 그 여자 분도 없었고 카페의 소란스러움도 아까보다 많이 잦아들어있었다. 나는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정우야 갈 거야?"

 "있어봤자 득 될 게 없을 거 같아."

 "왜 없어? 나 있잖아."

 너는 분명 나의 득이지만, 장소도 그렇고 너에게 붙을 질 나쁜 손님도 그렇고 내게 득 될 것은 변변치 않았다.

 "... 그래도 다녀올게."

 "어디로 갈 거야?"

 "도서관 가려고. 두 시간 정도는 더..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럼 나올 때 연락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이 상황을 얼버무릴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모르겠다. 언제 꺼내든 어색해질 거 같아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버렸다. 또 내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움직일까봐. 그러기 전에 이성을 먼저 잡아두는 쪽이 나았다.

 도서관에 가자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아직 시험기간이 아니라서 자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생각을 안 하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공식을 가지고 응용문제를 33개쯤 만들고 별자리를 이루는 별을 67개쯤 외우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래는 이렇게 공부 안 하는데... 사색에 빠질 틈 없이 계속 머리를 써야만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비워진 머리로 너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자리를 정리하고 그곳을 나와 카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감시간이 다 된 카페는 밖에서 봐도 한가해보였다. 밖에서 기다릴지 안에서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안에 있던 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도 살짝 손을 흔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발견 당했는데 밖에 있으면 네가 걱정할까봐.

 "정우야 왔어?"

 ". 카페도 마감 인가봐."

 "10시까지니까. 이제 마무리해야해. 이것만 설거지하면 되니까 조금만 앉아있어."

 비어있는 자리에 아무데나 앉았다. 지금은 어느 곳에 앉아도 상관없겠지. 조용하고 한가하고, 지금은 둘이 있기 딱 좋으니까.

 "다 됐다. 정우야 이제 가자."

 "."

 너와 카페를 나와서 같이 밤길을 걸었다. 밤 산책이 아닌 함께 걷는 하굣길. 생각보다 좋은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내가 나간 뒤로 그런 질문 받았어?"

 "아니? 전혀. 그거 신경 쓰였어?"

 "...신경 안 쓰려고 노력했어."

 "공부 열심히 했나보다. 난 정우가 내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안 하진 않아."

 "무슨 생각 하는데?"

 "알바 하는데 공부에 지장은 없을까..."

 "없어! 전혀! 나도 공강 날짜에 맞춰서 조정하고 일하는 거니까!"

 "그건 다행이네."

 "다른 건? 다른 건 생각 안 해?"

 "다른 건... 글쎄. 오늘 내내 그 질문 들었나 생각밖에 안 해본 거 같아."

 "그거 말인데."

 "?"

 "신경 쓰였다고 했잖아."

 "... ."

 "네가 신경 쓰인 이유가 혹시 질투가 아닐까?"

 "...?"

 "정우가 질투하는 건가 생각했었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조금 놀랐지만, 정우가 내 생각 많이 해주는 거 같아서 기뻤거든."

 "..."

 "그런데 정말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난 정말 정우뿐이거든!"

 "..."

 "나 못 믿어?"

 대답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네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이렇게나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네 말대로 이건 질투의 감정일까.

 내 감정조차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할 때 네가 내 손을 잡아왔다. 따뜻한 온기가 닿자 손을 잡아준 너를 바라보았다.

 "그치? 나는 정말 정우뿐인걸."

 "... 믿고 있어."

 "다음부터 그런 질문 받으면 확실히 애인 있다고 말할 거야."

 "...그것도 좋고."

 "그러니까 카페에 자주와."

 "그건 생각해볼게."

 "저녁시간 말고! 9시쯤에서 마감시간 전까지면 사람도 적단 말이야."

 "..."

 "자주 올 거지?"

 "...그럴게. 시험기간만 제외하고."

 ". 그거면 충분해."

 네가 내 손을 어루만져주었다. 그 어루만짐이 느리고도 조심스러워서 애정이 담겼다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 정우야."

 그 순간 무언가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공부한 지 일주일이 지날 때 쯤 나한테 전화가 한 통 왔다.

 "연정우!"

 "왜 임청아."

 "그 카페 알바생 말야. 요즘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더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SNS에 떴었으니까, 이래볼까 저래볼까 글 올라온단 말이야? 근데 거기 댓글로 그 알바생이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분명 너랑 관련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는데."

 "맞아. 내 애인이거든."

 "애인이었어?! 왜 나한테 안 말했어??"

 "너한테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서."

 "내가 기프티콘도 줬는데...!"

 ". 잘 먹었어. 또 먹고 싶어."

 "말이 그거뿐이야?!"

 "할 말이 더 있어?"

 "아니. 사실 없어."

 "그럼 끊어도 되지? 나 카페가야 해."

 "그래? 음~ 그래~ 나중에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카페에 들어섰다. 문을 열 때마다 딸랑- 거리며 울리는 종소리가 이젠 익숙하고 반갑기만 했다.

 "정우 왔어?"

 네가 반기는 그 목소리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은 뭐 마실래?"

 "네가 주고 싶은 거."

 "내가 주고 싶은 거? 십첩 밥상?"

 "...여기서 가능해?"

 "케이크 열 개는 가능할 거 같아."

 "...아냐. 라떼 마실게."

 "그래. 내가 예쁘게 아트해서 줄게."

 자리에 앉고 봐야할 논문을 찾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을 문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을 잠시 문서에서 뗄 때마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우연인가 했지만, 우연일리가.

 '일 해.'

 노트북을 살짝 내려 너만 보이게 속삭였다. 그러자 너는 내게 방긋 웃어 보인 뒤 시선을 밑으로 향하게 했다. 내가 일하라고 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아마 내가 논문을 다시 보면 또 어느 순간 눈이 맞겠지.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우연이 아니라 네가 나만 바라보기 때문인 걸 안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하라고 말해도 한 눈 팔 걸 알면서도 내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네가 나를 봐서 좋은 걸 알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도 좋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 일에도 네 일에도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선 내가 방향을 바꾸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자리를 반대편으로 옮겨 앉고 다시 노트북을 열자마자 지이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왜 돌려 앉았어?"

 "일하라고 했잖아."

 "일했잖아!"

 "일했어?"

 "했어! 정우꺼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트모양이네. , 고마워."

 "다른 말은?"

 "라떼 아트 예쁘다."

 "다른 말은?"

 "...오늘은 질문 받았어?"

 "그거 묻는 거야? 질문을 받긴 했는데 애인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

 "소문을 듣긴 했는데, 직접 들으니까 훨씬 낫네."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야?"

 "원하지 않는데도 말해주는 정보통이 있거든."

 "그렇구나. 근데 다른 할 말 없어?"

 "일 열심히 해. 나 계속 저 자리에 앉아있을 거니까."

 "손님도 없어서 조금 한가해도 되는데... 난 정우 보고 싶은데..."

 "손님 몰려오면 어쩌려고. 어제도 한 눈 팔다가 갑자기 손님이 10명이나 들어왔잖아."

 "그랬지... 괜찮아. 정우는 뒷통수도 예뻐."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닌..."

 "내 눈엔 예뻐. 그래서 정우야. 나 듣고 싶은 말 있는데."

 "손님 오신 거 같은데."

 때마침 들려오는 종소리에 말을 돌리고 주문한 커피를 가져갔다. 자리에 앉아 마감시간까지 논문을 볼 생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왠지 뒤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지만, 커피에서 새어나오는 열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조금 들이켰다. 한참 동안 논문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정우야, 마감시간인데."

 ", 벌써?"

 "너 그렇게 논문에만 빠져있으니까 몰랐지."

 ". 이 내용이 재밌어서."

 "난 개미와 베짱이 책이 재밌던데."

 "개미와 베짱이 책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 있는지 찾아볼게."

 "아냐 아냐 괜찮아. 나 여기 청소하는 것 만해도 바빠. 다 했으니까 이제 가자."

 네 말에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정리하여 등에 맨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방 들어주려고?"

 "동글아, 이 손은 손잡고 가자는 손이야. 물론 가방도 들어줄 수 있지만, 난 정우 손을 더 잡아주고 싶어."

 네 말에 손을 살포시 올려놓자 너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꼭 잡아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밤길을 걸어가며 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우야, 나 아직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한 너였다. 의도치 않게 무시한 거처럼 말하고 말았지만,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듣는 걸 포기하기 싫은 말인가 싶었다.

 "어떤 말?"

 "정우가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 오늘은 언제 잘 거야?"

 "정우 잘 때 쯤."

 "그럼 같이 자면 되겠네."

 "내가 재워줄 거니까. 그래서 정우야, 나한테 할 말은?"

 다른 말로 주제를 바꿔보려 한 건데 쳇바퀴 돌 듯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오늘 교수님이 새로운 주제로 강의를 하셨어."

 "그래? 그 주제가 재밌었어?"

 ". 흥미로웠거든. 요즘 내 관심사이기도 하고."

 "관심사? 어떤 거?"

 "감정에 대해서..."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해진 규칙에 맞추어 살아왔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이성에 묶어둔 채 내 일에 충실하며 고등학교까지 갔는데, 너를 만나 처음으로 감정의 요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요동이 낯설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중인건가 생각하며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너를 보면 이 감정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표현하기를 더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또 그 감정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인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감정이 나타난 원인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지, 나는 이 감정으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 감정으로 그 다음에 할 일을 정하여 딛고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주제로 강의해주시던 교수님의 수업내용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대답처럼 들렸었다. 내 감정이 일어난 원인이 너라면 그 결과로 나는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서 처음으로 쩔쩔맸던 그 경험이 내겐 너를 바라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할 말이 있는데."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너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너와 눈을 맞췄다.

 "진우야."

 "."

 "사랑해."

 

 내가 그 말을 건네자 너는 만족하며 기쁜 듯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다 잡지 않은 손을 올려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정우야 그거 알아?"

 "어떤 거?"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도 웃고 있는 거."

 "...난 잘 모르겠는데."

 "난 알아. 이 예쁜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싱긋 웃고 있어. 정말 예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네가 내 입꼬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놀랄 틈도 없이 겹쳐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움에서 네가 보였다.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예뻤는데, 이래도 못 믿겠어?"

 "모르... 몰라. 모르는 걸로 할래..."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정우니까!"

 네가 잡은 손을 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하니까 나도 네 걸음에 맞추어 걸어갔다.

 "정우야."

 "?"

 "나 나중에 카페하나 차릴 거야."

 ", 그거 좋네."

 "그리고 팻말을 달 거야. '정우 외 출입금지'."

 "...나 지금 회계는 나한테 맡겨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회계보다는 내 손님 돼주라. 너만 받을 거니까."

 "그럼 카페 차린 이유가 없잖아."

 "왜 없어? 정우가 오는데."

 "장사 적자 날지도..."

 "건물을 사서 건물주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 좀 나으려나..."

 "그치? 그러니까 정우는 걱정 말고 나만 바라봐. 내 눈엔 너만 보이니까."

 나에게 확신을 주는 네가 고맙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라는 이 감정이 주는 안정과 안도에 따뜻한 기쁨이 흐르는 듯 했다.

 "너에게 꼭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었어. 정우야, 나도 사랑해."

 네가 내게 전하는 진심 어린 고백이 내 마음을 잔잔히 적시는 듯 다가왔다. 너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네가 듣고 싶고 내가 해주고 싶을 때 그 말을 많이, 많이 해주어야겠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진우정우/선생×학생]

 

 

 '좋아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 따위 안하고 있을 텐데. 이 마음을 깨닫기는 참 오래 걸렸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여서 나는 솔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우 왔어?"

 "."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궁금하다고?"

 "."

 "전에도 이 비슷한 문제 가져온 거 같은데?"

 "원래 틀린 문제 또 틀리기 마련이죠."

 "그래도 정우는 잘 풀잖아."

 "아뇨.. 저도 다 잘 풀지는 않아요."

 문과와 이과가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까. 이과를 선택한 나와 문과인 선생님의 접점은 너무 적었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께 오는 이유는, 이과학생이라는 편견 없이 대해준 유일한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연히 풀어본 사회탐구 영역에서 모르는 부분이 생겼었다. 해설을 봐도 이해가 안 되서 말로 듣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어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들 '이과학생이 왜 이런 걸 묻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한 선생님들은 이런 거물을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제가 궁금하다는데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혼난 뒤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선생님."

 "? 정우구나. 무슨 일이야?"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요."

 "그래? 무슨 문제인데?"

 "이거..."

 "- 이건...-"

 선생님의 설명에 바로 이해가 됐었다. 역시 설명을 듣는 게 내겐 좋았던 것이다.

 "근데 선생님은 안 말하세요?"

 "?"

 "이과 학생이 왜 물으러 왔냐, 같은 거요."

 "정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건 학생이 궁금한 걸 물으러 왔다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그런 학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되는 거고."

 "..."

 내게 수학문제 풀라고 말하지 않아주었던,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오라고 이야기해주었던, 유일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준 선생님.

 그 선생님에게 점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자각하기란 내겐 의외로 무척 어려운 영역이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당장에 배웠겠지만, 세상엔 내가 배울 수 있는 한계와 내가 스스로 깨달아야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질문만 잔뜩 만들어가고 싶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었다.

 "이번 수능에 나왔다는 문제인데요..."

 ", 그렇네. 정우 이제 수능도 쳤고. 곧 졸업하겠네?"

 "...그렇네요."

 대학을 생각안 한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질문을 만들어 갈 수 없단 걸 알고 있었지만. 수능이 끝나고도 나는 이렇게 문제를 들고 왔다.

 "...졸업하면 더 이상 선생님은 못 보겠죠?"

 "왜 못 봐? 스승의 날이나, 정우 공강 날 오면 되지. 그렇지?"

 "그런가요..."

 싫어요. 그런 사제관계는 싫어요. 이제 졸업하면 나도 더 이상 고등학교 제자는 아닐 텐데.

 "...올게요."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과 다른 말이 나왔다는 걸 알고 나자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

왜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 언제든 놀러와 정우야."

 선생님의 미소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지원 넣은 대학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이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

 천문학과 합격. 수학과 합격. 물리학과 합격. 법학과 합격. 생명공학과 합격. 그리고,

 "여섯 개중에서 한 개만 선택해야 하는데..."

 합격한 모든 걸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은. 이미 내가 나의 한계를 깨닫고 단 하나만 공부하겠다는 결정의 마음이었던 걸까.

 "빠르면... 6년일까."

 재학과정 4년에 군대 2년이니까... . 하긴 선생님도...

 "안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한 번 뵈러 가야겠네."

 보고 싶어.

 "아니... 그냥 인사치례로..."

 보고 싶어.

 "대학 붙었다고 말씀드리러..."

 보고 싶어.

 "왜 내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좋아하니까.

 "...?"

 마음의 소리에 흠칫 놀라서 정신이 번뜩 뜨였다. 말도 안 돼... 그냥 작은 동경심일거야. 그런 선생님은 마땅히 우상이 되실만해. 그래서.

 "그래서 그래..."

 근데 왜 매일 질문을 만들어? 왜 사제 관계는 싫다고 생각한 거야? 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왜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솔직하지 못해?

 "..."

 난 그 의문들에 변명을 하지 못했다. 대답은 하나니까. 그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난 마지막으로 합격된 학과의 통지서를 바라보았다.

 「 지구과학교육과 합격

 

 "선생님."

 "정우야. 졸업 축하해. 선생님 보러 온 거야?"

 ". , 그리고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이번에 대학교 합격 통지서 왔는데..."

 "그래? 어떤 과 합격했어?"

 "천문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법학과, 생명공학 그리고 지구과학교육과 합격했어요."

 "전부?"

 "네 전부."

 "정말 우등생이라니까- 하지만 그 중 한 곳만 갈 수 있잖아.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 저 지구과학교육과 가려고요."

 "정했구나. 정우는 어딜 가든 잘 할 거야 분명."

 "...선생님."

 "?"

 "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근데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언제쯤 말해줄 수 있어?"

 "...아마도 6년 뒤쯤이요."

 "6년 뒤?"

 ". 저도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때 말씀 드릴게요."

 소신 있게 준비한 멘트에 진심이 담겨 선생님께 닿았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지금 듣고 싶은데..."

 "제자라고 달래시는 건가요."

 "? 아니. 정말이야. 지금 듣고 싶어. 정우야 6년은 조금 많이 긴 거 같아. 차라리 지금 말해줘 정우야."

 무얼 말할지는 모르고 분명 말하시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 또한 더 많이 배울 6년을 멋대로 낭비하긴 어렵다. 지구과학 교육과를 가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선생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서. 지금 이대로 내 마음을 말하면 선생님에 거절할 거 같아서.

 그런데 거절하는 거라면 6년 뒤에도 똑같을 수 있다. 지금 말해서 나쁠 거 없는 나의 6.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나의 6.

 이런 비겁한 변명을 덧칠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진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