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마님(@MIMA_castlavie2)의 종교마츠로 쓴 글입니다.

※ 주제 - 악마에게 현혹된 여신을 믿는 신부

※ 출처 - https://twitter.com/MIMA_cestlavie/status/1100368317858996224

 

 

[종교마츠] 당신을 위하여

 

 

 

 나의 여신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감사함을 믿음으로 모아 이 한 몸 바쳐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한 줌의 흙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 날까지도 나는 당신께 기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여신님이여. 부디 오래도록 이곳을 살피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귓가에 닿자 정신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눈이 천천히 뜨이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밤이네. 다시 눈을 감기도 애매하여 간만에 달이나 볼까, 하고 팔을 휘적거리며 물 위로 올라가보았다.

 , 아름답다. 나는 까만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달인건지, 금세 저 하늘에 마음을 빼앗겨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마 다른 누군가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이미 달을 향한 시 한 편을 적어 올려 보냈으리라.

 "~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면 좋을 텐데~"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런가~ 근데 여신님.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원래 밤에는 잘 안 나타나잖아!"

 ", 그게. 아무래도 누군가의 기도가 들려온 거 같...아서 랄까, 악마가 왜 여기 있는 거죠."

 "~ 기도라는 거 그렇게 큰 소리로 하는 거? 랄까, ? 나야 뭐~ 여신님 계신 곳은 어디든 있을 테니까?"

 "스토컵니까?"

 "꽤나 로맨틱한 대사였던 거 같은데?!"

 "전혀 아니었으니 돌아가 주시죠."

 "에에- 모처럼 여신님을 이 야심한 밤에 만났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 안됩니다. 근데 이리 말씀드려도 안 돌아가실 거잖습니까."

 "크으~ 역시 우리 여신님. 내가 여신님 좋아하는 걸 이리도 잘 알아요~"

 코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대는 이 요물은 흔히들 말하는 악마다. 하지만 악마치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신의 신성한 힘과 성수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 있기론 신의 힘이 먹혀들지 않는 악마는 힘이 아주 강하거나 아님 힘이 아예 없거나 인데, 내 생각에 녀석은 후자라 진작에 녀석을 막지 않았다. 녀석에게 힘을 쓰는 건 힘 낭비,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그래서 놔뒀거니 녀석은 시시때때로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이 밤에 만남도 그런 연유이겠지.

 "여신님 있잖아."

 "?"

 "저 달 갖고 싶어?"

 녀석은 자신의 손끝으로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가리켜보였다. 저 녀석이 참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달은 만물의 것이니 저 하늘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 그런가... 그래서 포기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면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애초에 갖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습니다."

 "흐응..."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녀석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바라보지 싶어 나도 녀석과 눈이 마주쳤는데 녀석의 감정이 어린 눈빛이 보였다. 저 눈빛은 마치.

 "나는 욕심나는데."

 "?"

 "나는 달이 갖고 싶어."

 "..."

 "포기할 마음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날아온 녀석을 난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차, 왜 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깨달았던 건 녀석이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여신님, 당신의 눈에 비친 그 달이 참으로 아름다워..."

 "악마..."

 "부디 나만의 달이 되어줘, 여신님..."

 그 때 녀석의 눈빛은 마치, 한순간 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던 나의 감정이 담긴 눈빛과 똑같아 보였다.

 

  오전 예배시간이 다가오자 성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있는 연못에서는 성당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내가 성당으로 갈 수도 없기에, 나는 이곳에서만 성당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를 하면 내 귓가에 간절함이 닿는다. 진심이 담긴 간절함이 닿으면 신의 신성한 힘을 조금씩 나누어줄 수 있었다.

 "기도한다고 전부 들어주지는 않아요."

 손을 모아잡고 눈을 감아 오늘도 부디 진심이 담긴 기도가 빌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예배시간 인가봐?"

 기도와 달리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기분이었다. 기도가 닿길 바라는 마음과 방해받는 건 별개의 일이었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어서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신성한 시간에는 악마와 상종하지 않습니다."

 "흐응- 그럼 좀 이따 올게?"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녀석의 기척이 사라졌다. 갔구나. 이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기도가 시작됐는지 허울 좋은 말들이 귀에 닿을 듯 말 듯 희미하기 들렸다. 오늘도 글렀구나. 지난밤의 기도는 그리도 선명하게 들려서 잠을 깨웠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기도 듣기가 참 어려웠다.

 "...그 기도는 신부님 것이었나."

 신에게 몸을 바친 인간은 그냥 인간보다 신에게 한 발짝 더 가깝기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부님의 기도가 남들보다 훨씬 진심인 것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신부님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기도가 내게 닿기를 바라고 있다. 더 많은 간절함이 내게 닿아 더 많은 이들의 바람을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평화롭고 안온한 세상이 만들어 질 텐데. 내 힘이 모자란 건지, 아니면 진심이 흑심으로 덮인 건지. 기도를 들을 수 없는 이유를 알지 못해 이렇게 답답해하고만 있다. 귀를 더욱 바짝 기울여 내게 진심이 닿는 이들에게 신의 신성한 힘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난 뒤에야 예배시간이 끝났다.

 "여신님- 예배시간 끝났어?"

 녀석이 끝나는 건 귀신같이 알아서 찾아왔다. 천천히 오거나 아예 안 오면 더 좋았을 텐데.

 ", ... 오전 시간은 끝났습니다."

 "- 있잖아 여신님."

 "?"

 "기도, 안 들리지?"

 갑작스럽게 허점을 찌르는 물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이런. 속내를 쉽게 들키면 약점 잡히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텐데. 재빨리 눈을 감고 평정을 찾고자 애썼다.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신이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 마음을 진정시키자마자 재빨리 미소를 찾아 지었다.

 "요즘 희미하게 들리는 건 사실이나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죠."

 "그냥. 직접 성당으로 가서 들으면 훨씬 잘 들리지 않을까하고."

 "...글쎄요. 저는 이곳을 빠져나가 본 적이 없고 또 빠져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거야 여신님의 힘의 근원지가 이 연못의 성수라 그런 거지. 근원지가 끊기면 신성한 힘을 못 쓰잖아."

 "물론 그렇죠..."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저리도 나불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채로 바라보기만을 줄곧, 한참이 지나자 녀석의 입이 열렸다.

 "그럼 있지~ 힘의 근원을 바꾼다면?"

 "...?"

 "알잖아 여신님. 내가 신성한 힘에 면역이 있다는 거. 사실 정확히는 안이 텅텅 비어있어서 막을 힘이 없는 거지만~ 이건 성수에도 해당된다고?"

 "그래서요...?"

 "내가 성수를 텅텅 빈 안쪽에 가득 채워 넣을게. 그럼 나도 성수와 비슷한 파장을 낼 거 아냐? 그럼 나로 인해 여신님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님?"

 이상한 이론을 떠들어대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성수로 가득 채운다고? 악마가?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고...! 물론 녀석에게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는 있지만. 굳이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해본 적 없는 일이에요."

 "그야 도전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요."

 "그러니까 해보자는 거고~"

 "왜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야-..."

 녀석이 내게 다가와 지난밤처럼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와 눈을 마주쳤다.

 "여신님은... 내 달이잖아?"

 "..."

 "물론 만물을 위해 그 자리에 있어줘야 하지만. 가끔은 괜찮잖아? 원하는데 있어도. ?"

 악마의 유혹이란 건 이런 걸까.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이리도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마음이 끌릴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이 묻어두어 자각도 못했는데 녀석은 어떻게 내 열망을 이리도 자극할 수 있었을까.

 "밑져야 본전이잖아~ 솔직히 여신님께 손해 가는 것도 없고! 어때?"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손을 잡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했지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내 마음은 결정된 사항이었다.

 나는 녀석이 내민 손에 살며시 손을 포개어 올렸다.

 

 녀석에게 성수를 주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어를 위한 공격이 아니라 종이에 물 스며들듯이 주입하니 온전히 그 힘이 다 들어갔다.

 "어떠신가요...?"

 "으음- 잠깐만..."

 녀석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펼치더니 연못에 손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나는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헤에... 이런 느낌인가?"

 "뭘 하고 계신건가요...?"

 "? - 어떤 파장이 맞는지 제어보고 있었어."

 저걸 저런 행동으로 알 수 있을까. 반복하고만 있는 동작을 몇 번 하다가 녀석이 갑자기 활짝 웃어보이곤 내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뭡니까?"

 "이제 여신님이 나올 수 있을 거 같아서!"

 그 말에 머뭇거리다 호기심 반 긴장 반으로 손을 올렸더니 녀석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아들게 했다. ...! 안긴 게 놀라서 버둥거리자 녀석이 두 팔로 꼭 안아 진정시켜주었다.

 ", 여신님. 이 느낌이지?"

 ".... 확실히..."

 녀석이 품은 성수의 힘 때문인지 잔잔한 연못 속에 있는 거처럼 안정되고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힘의 근원이 옮겨졌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인 걸까.

 "오후 예배시간은 언제지?"

 "곧 시작되긴 합니다만..."

 "그럼 바로 성당으로 가야하는거지?"

 ".... 가고 싶습니다."

 "그럼 예배 끝나고 나랑 데이트하면 안 될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뭐어- 여신님 이제 나한테 이렇게 안기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쟌?"

 그 말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녀석은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걸까. 작게 숨을 내뱉곤 대답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원하는 곳에 한 번 쯤 발을 들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흐응- 그 마음을 좀 더 키우면 이곳저곳 갈 수 있을 텐데."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하죠."

 "네이 네이-"

 내 말을 잘 알아듣긴 한 건지 녀석은 나의 어깨와 다리를 두 팔로 단단히 감싸고 안아들어 하늘을 날았다. 처음 맞는 하늘의 바람은 연못에서 맞던 바람보다 훨씬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늘 올려다보기만 했는데 이제는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마치 하늘을 마주하는 신이 된 기분이었다.

 "하늘을 처음 날아본 소감은 어때?"

 "...나쁘진 않네요."

 "그럴 땐 좋다, 라고 표현하는 거지~"

 "...당신은 어떤데요?"

 "나는 엄청 좋아~!"

 "그러신가요..."

 "! 나의 달과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해..."

 "..."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녀석에게 일일이 대꾸하면 왠지 내가 나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그 하늘을 즐기기만 했다. 언제까지고 즐길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지금을 만끽하고 싶었다.

 얼마나 만끽하고 있었을까, 녀석이 고도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 거의 다 왔나보다. 궁금해 하지 않아도 성당 근처에 도착했다는 것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

 "고맙습니다..."

 녀석에게서 내리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당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처음 마주한 성당의 모습은 굉장히 거대하고 화려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보이지도 않는 신께 기도를 드리고, 신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겠지. 어쩌면 서로가 미련했을지도. 또 어쩌면...

 "여신님."

 "?"

 "이제 강림할 시간이야."

 생각이 흩어지자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망설일 이유도 명분도 없던 나는 녀석이 내민 손을 꼭 잡았다.

 

 녀석을 따라 성당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 쪽 정면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보였다. 우리는 그 곳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 모습은 안 보일거야."

 "그런가요?"

 ". 대신에 여신님의 힘을 조금 쓴다면 여신님은 보일지도 모르지?"

 녀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가. 신의 신성한 힘을 쓴다면 보일 수도 있구나. 나는 녀석과 함께 그들이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는 십자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이들에게 내 모습이 보이기를. 그렇게 눈을 감고 빌고 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신님...?"

 그 목소리는 지난 밤 간절히 기도했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아아, 누군지 알거 같아. 눈을 살며시 뜨고 바라보자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그 분.

 "신부님!"

 당신을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줄 몰랐다. 나는 기쁜 마음에 모았던 두 손과 두 팔을 넓게 펼쳐 신의 신성한 힘을 넓게 퍼뜨렸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내 모습이 보이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큰 소리로 나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그들의 기도를 듣고자 하였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주기 위해 나는 내 선택과 의지로 여기에 왔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아직도 기도가 들리지 않는 거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렇게 모두가 보이는데. 나는 여전히 귀가 뚫리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가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내 귓가에 들려오는 건.

 "아아- 즐거워라-"

 내 뒤에 서있는 악마의 목소리.

 "..."

 ", 여신님- 신의 신성한 힘을 뿌려야지 않아?"

 "그렇죠... 하지만..."

 "아아- 아직도 안 들려?"

 "그게..."

 "괜찮아. 내가 여신님 대신 기도를 들어줄게."

 "...?"

 "몰랐어? 나 여신님이랑 계약해서 여신님과 같은 힘을 쓸 수 있거든."

 녀석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하던 사이, 녀석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나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뿔과 꼬리를 숨기고 내가 입은 하얀 옷으로 바뀌자 영락없이 내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던 녀석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신부님을 바라보자 내게 향했던 시선이 녀석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 모습이 안 보이는 거야...? 움직이려고 하자 힘이 점점 빠져나가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녀석이 내 입과 힘을 봉인시켜 놓고, 나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활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 입 닫아줘.

 "여신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구제해주겠노라."

 제발 그만해.

 "그러니 원하는 것은 모두 지금 말하라."

 그만 말해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   *   *

 

 

여신님이 쓰러졌다. 그렇게 충격 받을 일이었나. , 신의 신성한 힘을 빌려 쓴 것에 대한 결과겠지.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여신님의 모습을 똑같이 복제했는데 여신님이 쓰러진 탓에 내가 힘을 못 받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네?

 "악마..."

 "~ 신부님!"

 내 모습이 보이자 신부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저 순진한 눈에 증오를 심고 계셨네. , 당연한 일인가?

 "지금은 보는 눈도 있고- 어차피 여신님이 쓰러져서 신부님 외에는 날 보지 못할걸? 감정 흐트러지기 전에 어서 예배부터 끝내시지?"

 그래, 아마 저 인간들 눈에는 여신이 강림했다가 사라진 걸로 보일걸? -, 하고 콧방귀를 뀌어 보이니 신부님은 다시 평정을 찾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하, 보이지 않던 신의 등장에 이렇게나 열렬해질 줄이야. 재밌네, 보기 좋아. 나는 여기서 친히 기다려줄게. 신부님께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말이지.

 열렬했던 예배시간이 끝나니 인간들은 성당을 하나 둘 나갔다. 그렇게 텅텅 비자 신부님과 나, 그리고 아직도 쓰러져 있는 여신님 셋만 남았다.

 "신부님~"

 "악마... 여기 뭣 하러..."

 "뭐하긴! 당연히~..."

 "이곳은 네가 못 들어오는 곳인데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

 그래, 나는 이곳에 못 들어왔다. 들어 오려하면 신성한 곳이란 이유로 튕겨져 나가진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나 이곳 엄청 좋아하는데! 근데 저 신부님은 날 여기 못 들어오게 막아 놓기나 하고!

 "당연히 여신님의 힘으로 들어왔지~ 믿음으로 힘을 얻는 걸 여신님 혼자 독점하는 건 이기적이쟌? 나도 힘 얻고 싶다구~"

 "말 같잖은 소리를..."

 '신의 신성한 힘' 100퍼센트 완벽한 신의 힘이 아니란 말이야! 신 혼자는 절대 못 써! 인간들의 기도와 믿음을 빙자한 간절함이 50퍼센트 정도는 있어야 신의 계급을 받은 녀석들은 다 쓸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대량의 믿음과 간절함만 받는다면 그까짓 힘은 충분히 쓸 수 있는데...!

  나 같은 악마는 인간들을 하나씩 일일이 꼬셔야 하지만, 이런 커다란 성당은 인간들이 알아서 대량의 믿음을 가져와 준다.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성당에는 서있기만 해도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저 망할 신부님 때문에 내가...

 "하지만 말야- 내가 이곳에 이렇게 들어 올 수 있게 된 거 신부님 덕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너는 여신님의 힘으로 들어온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하하- 그 도움도 있었지만- 애초에 난 원래 여신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옆에..."

 "그거, 신부님이 기도 드렸잖아."

 "...내가?"

 "- 간밤에 신부님이 기도드렸던 거. 나도 듣고 있었으니까-"

 헬쭉- 웃어보이곤 쓰러진 여신님께 다가갔다. 역시 내가 여신님의 힘을 많이 가져가서 쓰러지셨네. 지금 이곳에 믿음을 줄 인간들도 없기도 하고, 내가 갖고 있는 성수의 힘으로 그 분을 깨우는 건 턱없이 부족한 일이었다. 하긴 나는 성수의 힘을 무한대로 낼 수도 없을 뿐더러, 근원을 바꾼다는 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나는 그 분을 안아들고 신부님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계시면 분명 소멸당할 거니까. 더 얘기 나누고 싶다면 연못으로 와, 신부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못 참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좋아서 손이 떨렸다. 아아,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럼 여신님께 미움을 사겠지? 신부님도 보아하니 나를 죽이고 싶나 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신부님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나약해빠진 십자가를 두 손에 꼭 쥐고 기도를 드리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상종할 이유 따위 없었다.

 

 여신님을 연못으로 데려가 담갔더니 저절로 잠식하였다.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처음 여신님을 만났던 것이 기억났다.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여신님이 계신 연못을 바라보았다. 기도를 듣고 있던 여신님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달과도 같았기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큰 용기 먹고 다가가면 그 멀리서도 성수의 힘이 사정없이 공격해왔다. 그래서 여신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정말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최대의 행복이라 생각하며 바라보기만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여신님께 다가가도 공격당하지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예상대로 성수의 힘이 나한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성수가 공격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내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여신님께 다가갔다.

 "안녕 여신님?"

  "...악마?"

 내가 악마란 이유로 잔뜩 경계심 받아버렸지만 어째서인지 여신님의 직접적인 공격에도 전혀 다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열심히 공격당했지만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결국 여신님은 날 공격하는 걸 포기하시고 내가 나타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여신님~"

 "또 오셨습니까."

 "! 여신님 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당신은 텅텅 빈 것 같습니다."

 "텅텅?"

 ". 당신이 제게 올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은 신의 신성한 힘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흐응..."

 여신님은 내가 공격당하지 않는 걸 '텅텅 비었다.'라고 표현하셨지만, 글쎄. 과연 나는 텅텅 비었을까. 성수가 저항하지 않는 힘. 여신님께 다가오기 전에는 분명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내 힘이 정말 전부 텅텅 빈 것일까?

 텅텅 비었다면 채워야지. 명색에 악마인데 무언가를 이루어줄 힘도 없이 누군가를 유혹하여 계약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중에 힘을 채우기에 아주 적절한 분이 내 옆에 있었다. 계약을 이용하여 그 분의 힘을 얻는다면 나는 그 분도 갖는 것이 되는 거 아닌가. 다가갈 수도 없던 시절보다야 지금이 훨씬 행복하지만, 이보다 더한 욕심이 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나의 달을 가질 수 있다는데.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정말 멍청한 이의 짓이 아닐까.

 그래, 여신님과 계약하자. 계약해서 여신님의 영혼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자. 솔직히 여신님을 상대로 계약하는 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한 평생 누군가를 유혹하는 일을 해왔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여신님과 계약하기, 그것을 최종 목표로 삼자 낯익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여신님께 다가올 수 있었던 아주 결정적인 이유가 담긴 그 신부님의 기도가.

 「 나의 여신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감사함을 믿음으로 모아 이 한 몸 바쳐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한 줌의 흙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 날까지도 나는 당신께 기도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여신님이여. 부디 오래도록 이곳을 살피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라니."

 웃겼다. 그 기도가 내게도 들리던 그 날 밤, 나는 너무 웃겨서 배꼽잡고 웃었다. 난 내가 텅텅 빈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텅텅 비어있던 건 신부님이던데? 아하하- 저런 기도를 매 밤마다 하고 있었으니 내 힘이 무효화될 수밖에.

 "내 힘을 악의 힘이라고 인지하고 없앤 거잖아!"

 하하- 나를 성당으로 들이는 일은 그렇게 혐오하더니 그런 기도를 드리며 여신님 옆에 나를 두게 하였단 말이지. 그건 어리석은 신부님이 자초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걸 있는 그대로 이용해드려야죠. 나도 머리 굴릴 줄은 안단 말이지?

 

 회상에 잠겨있다 보니 누군가가 오는 것을 몰랐었나보다. 그러나 누가 왔는지는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 와주셨네, 신부님?"

 "...여신님은 어디계시지."

 "회복하러 가셨어. 걱정 마, 해를 끼치진 않았으니-"

 "..."

 "워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으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날라 간다구?"

 "나는 대화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뭐 하러 온 건데."

 "악마를 처단하러 온 것이다."

 "- 나를?"

 "이 이상으로 여신님을 흉내 내는 짓은 없어야하지 않겠나."

 "흐응-... 근데 이를 어쩌나? 나 이미 여신님이랑 계약했는데?"

 "...?"

 "뭘 그리 놀라?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까는 나 때문이라 하더니..."

 "그것도 맞고."

 "..."

 "자자, 이 몸이 친히 고해성사해 줄 테니 잘 들어. 한 번 밖에 안 말할 거니까 딴 짓하면 안돼요~"

 신부님께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의 기도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부터 내가 여신님과 계약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여신님이 내 손을 잡았던 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아무리 내가 텅텅 비었다지만 본래 악마라서 계약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원래는 소원 같은 걸 이루어주거나 그럴만한 힘이 필요하지만, 뭐 어때. 여신님이 원하는 소원은 그런 무지막지한 힘이 없어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소소한 거였는걸.

 진실을 숨기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듯이 아름답게 덮어 말하자 안타깝게도 세상 물정 모르는 가여운 여신님은 나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성수의 힘을 내 안에 가득 주입해주었다. 텅텅 비었다는 걸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성수의 힘이 들어오자 확실히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묘한 쾌감에 기분이 아찔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여신님이 의존할 수 있는 힘의 파장을 찾아내었다. 성수의 힘은 여신님 힘의 근원지이며 여신님의 생명줄이기도 하니까 여신님은 온전히 나한테만 의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때?"

 "무엇이..."

 "여신님이 나한테만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니까?"

 "..."

 "~? 당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따르던 분이 이제 나없인 못 산다니까?"

 "그래서... 널 처단하면 안 된다는 건가..."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 거야?"

 "..."

 내 이야기를 드디어 이해해준 신부님이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게 보였지만 눈감고 무시했다. 하하- 이보다도 합리적인 계약이 또 어디 있을까. 신부님 덕에 힘은 사라졌지만,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여신님을 옆에서 볼 수 있고 여신님의 힘을 빌려 쓸 수 있고 여신님은 이제 내가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저 망할 신부님은 내 털끝하나 건들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여신님은 내 것이다. 그 분의 영혼까지도 모두, 내 것인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 신부님."

 "..."

 "돌아가서 지금까지처럼 여신님 믿는 인간들을 잘..."

 "여신님..."

 "...?"

 신부님이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나보다 더 뒤 쪽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 세 여신님이 수면 위로 올라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드디어 일어나셨구나. 당신을 보고 있자니 설레는 감정이 어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여신님~ 이제 일어났어? 보고 싶었어!"

 나는 해맑게 웃어보였지만 여신님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여신님의 시선조차도 내게 향하지 않았다. 나를 두고 어딜 보는 건지. 기분이 나빠져서 당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 끝에는 신부님이 있었다.

 "...여신님." "돌아가 주세요, 신부님."

 "하지만..."

 "나중에 신의 부름을 이용해 부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돌아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신님의 말에 망부석 같았던 신부님은 끝내 발길을 돌렸다. 그제 서야 여신님의 시선이 오롯이 나에게 닿았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악마..."

 "! 여신님~"

 "저는 왜 쓰러졌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씨익 웃어 보였다.

 

 누군가의 기도가 귓가에 닿자 시선이 한 곳을 가리켰다. 눈을 천천히 옮기자 보이는 것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밤인데. 다시 눈을 부벼 보았지만 간만에 빛이 보여 날개를 펄럭거리며 빛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 아름답다. 나는 까만 연못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달인건지, 금세 저 연못에 마음을 빼앗겨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마 다가갈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미 어둠뿐만 있는 저 하늘로 도망가 버렸으리라.

 "좋아해, 여신님."

 신부님께 고해성사 했듯이 당신께도 지금까지의 내 모든 걸 고백했다. 당신을 처음 본 그 날부터 지금까지. 설사 미움을 받더라도 나는 눈앞에 있는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

 "나를 바라봐줘."

 "바라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저는 이제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뢰 안 해도 돼."

 "믿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걸 져버리라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약했잖아. 그런 거, 우리 사이엔 쓸모없는 걸."

 "그래도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한 없이 단호하게 굴지만 나를 내치지 못 하고 있는 여신님의 마음은 여리게 보였다. 근데 그게 더 매력적인 걸! 아아, 사랑스러워라. 당신은 내 것이 된 지금조차도 나는 당신이 내 것이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왜 저를... 바라신건가요..."

 "그거야 아름다웠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였습니까.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취해 제 행세를 계속 하시지 그러셨나요."

 "~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지. 그건 오랜만에 얻은 힘에 취한 것이었고."

 "오랜만이요...?"

 ". 여신님이 나한테 '텅텅 비었다'고 말했었잖아. 말 그대로 난 텅텅 비어있었는데 성수로 힘을 얻었지? 근데 그건 여신님을 위한 힘이었어. 나는 오히려 성수에서 힘을 얻은 여신님의 신성한 힘을 쓸 수 있었어."

 "고작 그런 이유로..."

 "게다가 여신님은 안 들렸던 기도들, 내게는 다 들렸었으니까. 악마는 좋은 기도 나쁜 기도 안 가린다고? 그래서 여신님 대신 내가 모습 바꾼 거였다고. 신의 신성한 힘을 쓰면 모든 기도들을 들어줄 수 있잖아?"

 "...그건 함부로 쓰는 힘이 아닙니다. 간절함이 닿아야만 쓸 수 있는..."

 "여신님이라면 성당을 가도 안 들릴 건 안 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

 내 말에 여신님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욕망이 앞섰다는 걸 알고도 왜 가만히만 계시는 건지. 설마 죄책감 같은 걸 느끼시는 걸까? 하하, 그건 너무 우스운데?

 "후회하고 있어도 계약을 무를 수는 없어."

 "계약은... 절대적임을 압니다."

 "! 잘 알고 있네!"

 "악마..."

 "여신님, 내 이름 오소마츠인데, 그렇게 불러주면 안될까?"

 이름 없이 계약을 한 상태는 사실 엄청 불안전한 상태이다. 이름을 알면 서로에게 각인이 되어 몸까지도 전부 갖게 되는데, 이름을 안 불렀으니 아직 여신님의 영혼만 내 것인 거다. 몸까지 한 번에 갖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손잡는 걸로 계약하는 거에 이름까지 넣었다면 바로 계약이란 거 들켰을 테니까. 다 된 밥에 재 뿌려서 계약 무르는 것보다 이름 안 부르는 게 낫지. 어차피 이름 정도는 나중에 알려도 괜찮겠지 싶었다.

 쵸로마츠. 당신에게 반한 이래 그리도 아껴 부르려고 쟁여두었던 당신의 이름.

 당신 없이 살아가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젠 당신도 나 없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아하하, 이런 결말을 얼마나 바라왔는지! 나도 당신도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이 상황을!

 "...제 이름은 아시나요."

 "물론이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인데!"

 "...어리석으시군요."

 "차마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표현해줄래?"

 "말 같잖은..."

 나는 그저 씨익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의 방어였으니까. 아아, 이젠 무를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어.

 "약속할게. 신뢰가 없는 일방적인 약속이지만, 여신님을 위해 약속할게. 내가 여신님에게 빌려 쓰는 이 힘은 이제 절대 나쁜 곳에 쓰지 않아."

 "믿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켜보기는 하죠." "이제 평생 지켜봐야 하는데 무슨 걱정이람?"

 "그런가요..."

 씁쓸한 미소가 걸린 저 낯빛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내가 역시 잘못된 걸까? 아냐, 이건 당연한 거다. 지독한 콩깍지가 쓰인 나에겐 당연한 것이다. 당신이 나를 바라본다. 아아,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눈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부르려고 저 작은 입이 나를 위해 사랑스럽게 달싹인다.

 "오소마츠."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황홀감에 젖어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 사랑해 나의 쵸로마츠."

 

[1차 연성] 白夜

 

 

 

# 1.

 

 첫 기억은 눈물도 흘리지 않던 부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모습조차도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그 손에 이끌려 돈이 많다던 그 커다란 집에 도착한 것은 잊혀 지질 않는다.

 ‘사랑한단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작은 나를 꼭 껴안고 나서는 도망치듯 커다란 집에 나를 두고 떠났다. 그 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이름이 없던 것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이름도 참 내키는 대로 불러댔으니 그 땐 전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남자 아이만 이름이 있고 여자 아이는 이름이 없다고, 오라비는 멋진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커다란 집에 오게 된 것도 다 오라비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라비 장가갈 날은 다가오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는 나를 커다란 집에 팔아 넘겼다. 부잣집이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주인집 양반이 나이도 찼는데 혼인을 안 한다는 둥의 소문이 안 좋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안 좋은들 돈이 필요하니 딸까지 팔아버리는 인간들의 양심이란,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름이 무엇이느냐.”

 “이름이 없사옵니다.”

 “이름이 없으면 무엇이라 불렸느냐.”

 “봄에는 꽃분이요, 여름에는 점순이라 불렸고, 가을에는 낙랑이라, 겨울에는 설령이라 불렸사옵니다.”

 

 이름이 없어 보이는 대로 불렸다는 것을 참 시적으로 말하고 나니, 8살이 말하기에는 참 덤덤히도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8살답지 않게 칭얼거리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으며 그저 차분하고 어떻게 보면 어른스러운. 약간의 흑역사도 곁들여지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붙여줘도 괜찮겠느냐.”

 

 나를 보며 묻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주춤거리지도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 발에 맞추어 서 있자 무릎을 굽혀 내게 눈을 맞춘다. 동의를 얻는 듯 한 당신의 묘한 눈빛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리에 손을 대고는 당신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 ‘백야(白夜)’이니라.”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자 나의 검었던 머리는 흰색으로 물들었다. 희고도 하얀 머리와 빛을 못 봐 그을리지 못한 피부는 환상의 조합이라도 되는 마냥 나를 투명하게도 빛나게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하얀 머리와 하얀 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2.

 

 “나으리, 소녀 혼인시켜주시어요.”

 

 돈이 권력인 것은 그 시대에도 당연했다. 돈으로 벼슬을 사는 시대도 있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돈을 아끼는가. 내게 나으리라고 부르라 하던 당신도 그 돈으로 나를 공부시켰다. 서당을 다니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반대로 스승을 집으로 불렀다. 공부 좀 했다는 스승도 처음엔 나를 성별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거부하려 들었지만 돈은 많이 주니 일단 가르쳐보았는데 사내보다 영특하다며 나중에는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 났었다더라. 그 말에 우리 나으리 한사코 거절했다지만.

 

 “혼인...이라 하였느냐.”

 

 공부하던 어느 날, 스승이 내게 물었다. 시집은 언제 가겠냐고.

 시집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리 자각시켜주니 문득 내 나이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 이팔청춘마저도 넘긴 소녀 나이를 보시어요.”

 

 나으리에게 온 것이 8살 때. 그리고 나으리 밑에서 산지 어언 10.

 그 당시 내 나이 18.

 그 때 나으리의 당황하고도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내는 있고 말하는 것이냐.”

 “... 그것은 없으나, 그래도 혼기 찬 여인이 혼자 사는 것도 문제라 들었사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혼인시켜 달랬으니 우리 나으리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내도 없으며 어찌 혼인을 시켜 달라 한 것인지, 혼인을 할 돈은 있는지, 혼인을 한 뒤의 계획도 있는지 등등. 물론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혼이 전부 털렸다.

 

 “그래도... 소녀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시지 않으시어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거야 나으리도 혼인을 하실 게고, 저도 혼인을 시켜 주실 게고... 어찌 되었든 소녀를 죽을 때까진 데리고 있으실 생각은 없으실 거 아니어요.”

 

 아무리 돈을 주고 사왔다 한들 노예보단 양딸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에 나으리도 딸의 혼인 정도야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 알았다. 물론 우리 나으리가 오랜 세월동안 혼인 안 했다고 말은 많았으나, 나으리 정도의 미모이면 그 아무리 40살이라 한들 누구든 혼인 하겠다 줄을 설 정도였다. 게다가 설마 나와 혼인하고자 나를 사왔을까. 나으리의 행동을 10년간 봐왔기에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나으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

 “무엇보다 넌 인간도 아니지 않느냐.”

 

 나으리는 나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셨다. 그리고 나으리는 내게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생각을 그만두었다. 저것은 그저 나으리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단순한 사고가 참 우스웠다.

 와하하,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내가 너에게 이름을 준 날부터 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 보아라.”

 

 나으리는 내게 보아라, 명하셨고 나는 그저 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으리 뒤쪽으로 무언가 하얗고 커다란 게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꼬리를 닮았사온데... 그것이 무엇이어요? 나으리 뒤에 짐승이라도 있으시어요?”

 “이것은 내 꼬리이다.”

 “...?”

 “나는 본디 인간이 아니라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九尾狐)란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나의 뒤쪽을 만져보았다. 무언가 만져지자 그것을 잡아 크기를 가늠하였는데, 그것은 작고 따뜻하고 복슬복슬하며 자신만의 자아가 있는 듯 내 손에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그것에 대해 이질감이 들어 그것을 확 놓고 말았다. 누군가 내 뒤에 작은 강아지가 꼭 붙어 안 떨어지는 것이라 말해주었음 할 정도로,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나으리...”

 “10년 간 그 정도의 꼬리가 자란 것이니라.”

 “하지만 소녀는... 전혀 몰랐는데...”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네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꼬리도 안 보일 것이니라.”

 

 인생 18년 째, 처음으로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 뒤로부터 모든 행동에 심혈을 기울여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거 잊어도 애초에 여우가 아니었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기 무방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안 후 부터 나의 혼인 이야기는 쏘옥 들어갔다.

 

 “어찌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닌 영물이래도 달아나지 않느냐.”

 “달아나서 소녀에게 득 되는 것은 무엇이 있사옵니까.”

 “어딘가로 달아나 구미호가 된 것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럼 무엇 하옵니까. 10년이 지나도 나으리께선 변한 것이 하나 없는데 소녀라고 오죽 하겠나이까. 그리고 이미 팔려 온 몸, 나으리가 거두어주셔서 감사하온데 어딜 가서 또 간사히 몸을 챙긴단 말이옵니까.”

 

 구미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나으리는 이제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공부를 한 덕인지 나으리 곁에 있는 것이 훨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내가 달아나서 무엇하리오. 나는 그렇게 나으리 곁에서 구미호의 삶으로 더 살게 되었다.

 

 

 

# 3.

 

 200년이 지났다.

 구미호로 산 지 어언 200. , 시간 참...

 

 “빠른 거여요?”

 “무엇이 말이냐.”

 “200년이란 시간 말이어요.”

 “빠른 것이라 느끼느냐.”

 “어림조차 못 하겠사와요. 나으리는 어떠신지요?”

 “내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느니라.”

  

 나으리의 말에 나는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꼬리 하나에 100년을 산다는데 이 900년 하고도 나와 200년을 더 사신 나으리온데. 1100년 이란 세월은 정말 어림할 수가 없었다.

 200년 간 외모가 바뀌지 않았다. 겨우 100년에 한 살 먹는 속도로 성장이 늦어지는 기분이었다. 고로 나는 인간 나이로 20살 쯤. 다들 혼인하고 아이 낳을 때 나는 200년을 살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아무렇지 않는 것이.

 한 곳에 약 20년을 머물다가 거처를 옮긴다. 빠르면 10, 좀 괜찮으면 25. 그러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노년층이 있다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단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웃어넘긴다. 그것이 다였다. 처량하다. 본인을 본인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남을 부르듯 웃어넘기고.

 

 “나으리는, 인간이 되고 싶사옵니까?”

 “...어떤 여우는 그리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여우 말고, 나으리 말이어요.”

 “...나도 되고 싶었다.”

 “왜요?”

 “긴 삶을 사는 건 너무나 혹독한 일인 것을 알았으니.”

 

 100년도 안 되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라고 하니 당연히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당신은 버티기 힘들었겠지. 꼬리하나가 자랄 때 쯔음 이미 다른 이들은 사라지고 없으니까. 나를 거두어주신 당신은 참 정에 약한 여우였다. 더 인간다웠다. 인간이 되고 싶던 이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시온지.”

 “지금은, 그러려니 살고 있다. 너도 있고.”

 “...그럼 소녀를 구미호로 만드신 이유는 소녀를 나으리 곁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사옵니까?”

 “...비슷한 명분이라 일러두겠느니라.”

 

 200년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었는데도 난 아직 나으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 많은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왜 나으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까. 차암, 이리 아버님 같은 분을 나는 그리 오래도 따랐다. 마치 숨기시는 게 많은 아버님 같은, 그런 당신은 언제나 당신을 숨기려고만 한다.

 

 “소녀도 인간이 될 수 있사옵니까?”

 “그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허지만 인간을 여우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로 여우도 인간으로...”

 “나도 그리 인간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

 

 구미호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구미호가 되는 일은 내가 처음이지만,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거듭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이지?

 본래 인간이 구미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구미호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 4.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자 하니 나으리가 안계셨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시는 일이 요즘 잦아지셔서 오늘도 그러시거니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변수가 좀 있는 날이었다.

 

 “, 자네 있는가?”

 

 누군가를 찾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왔다. 그 손님이 누군지 모르고 누구를 찾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누구시어요?”

 “자네는 누구인가?”

 “...소녀는 백야라 하온데...”

 “나는 린이라 하네.”

 “그래서 누구시어요...?”

 “그건 내 나중에 알려주겠네.”

 

 그는 참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갓을 쓰고 훤칠하게 생긴 사내는 나보다 키가 컸기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연, 있는가?”

 “...? 혹 나으리 말하시어요?”

 “나으리, 라 부르는가?”

 “. 그리 부르옵니다.”

 

 그러고 보니 나으리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으리의 이름은 인가. 처음 듣는 나으리의 이름이었다. 헌데 나으리는.

 

 “나으리는 지금 집을 비우신 상태이옵니다.”

 “집에 없는가?”

 “.”

 “흐음.”

 

 그는 자신의 턱을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

 “..., .”

 

 손님은 나으리의 친구일까. 나는 그가 들어오자 부엌으로 가서 마실 것을 내어왔다.

 

 “드시어요.”

 “고맙네, 그래.”

 “나으리는 어인일로 찾으시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 내 오랜 친구가 보고 싶어서.”

 “..., 그런데 나으리는...”

 “나는 연의 오랜 친구인 기린이라네. 자네는 구미호인가?”

 “.... 구미호이옵니다.”

 

 나으리의 친구라는 그는 해태같이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기린이었다.

 

 “연은 언제 오는가?”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근래에 일찍 나가시어 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잦으시긴 하온데...”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 ...”

 

 무언가를 아는 듯이 다시 턱을 쓰다듬는 그 분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찰나 내게 빙긋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나와 친구하겠는가?”

 “?”

 “나는 그리 연과 친구를 하게 되었다네. 나이는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을게야.”

 “하지만 나으리 친구분이시면...”

 “괜찮네. 우리는 어차피 불멸의 존재이니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나와 친구하세. 백야였는가?”

 “.... ‘백야가 소녀의 이름이옵니다.”

 “말 놓으세. 편히 부르게나.”

 “...그리 하도록 노력해 볼 테니 재촉 좀 하지 마시게나...”

 “허허, 알겠네 알겠어.”

 

 나으리가 집을 일찍 나가신 날, 나는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었다. 하지만 나으리처럼 계속 같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만날까 말까할 정도였다.

 어쩌다 만나면 참 기뻤다. 왜냐면 그 날 나으리가 나가시고 전혀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쭉 혼자였기에 어쩌다 그를 만날 때마다 참 기뻤고 혹여 나으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도 나으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시겠지, 그리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산지 몇 년이 지났던가.

 

 

 

# 5.

 

 “몇 년이 아니라 몇 백 년이 흘렀지.”

 

 때는 한 여름. 나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 내 앞에 있는 빈자리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지내었는가?”

 “보시다시피? 너는 어때.”

 “나도 보시다시피 지내내.”

 

 내가 어디를 가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내었다. 그건 우리 나으리 때부터 그랬다던데. 떠돌이 생을 사는 그라지만, 그도 어쩌면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마실래?”

 “시원한 커피로 부탁하네.”

 “내가 사는 거야?”

 “그러려고 내게 물은 거 아닌가?”

 “맞아, 사줄게.”

 

 나는 피싯-, 웃고는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켜주었다. 같이 지낼 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은 게 몸에 배었다고 해야 할까. 그 옛날에도 돈이 많았지만 쓰는 법을 잘 몰라 가만히 두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쓰고 있다.

 

 “요즘은 어찌 지내는가?”

 “요즘은, 친구들이 생겼어.”

 “나 같은 친구들이 말인가?”

 “. 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나만큼 오래 살 친구들.”

 “오호, 어찌 만났나?”

 “살 곳을 정하다가. 하숙집이라 길래 처음엔 꺼려졌었는데 그 집주인이 내 정체를 그냥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만나게 됐지.”

 “그래서 재밌는가?”

 “당연하지.”

 

 그를 위해 시켰던 아메리카노가 완성되었는지 진동 벨이 울렸다. 그에게 벨을 쥐어주며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으리는, 아직도 못 만났어?”

 “? 으응, 아직도 못 만났네.”

 “...어디서 잘 살고 계실까?”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 믿게나. 연이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

 “하지만 나한테 말없이 가실 분이 아닌데...”

 

 약 200년 같이 살았지만 그리 믿음이 없으신 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세월에 무뎌져 그의 말대로 어디서 잘 계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너도 하숙집에서 살 생각 없어? 방은 집주인이 만들어 줄 텐데.”

 “미안하지만 난 떠돌아다니는 게 더 즐겁네. 어디 발 묶여 있는 건 질색이라네.”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 권유할 생각은 없지만.”

 “그거면 됐지 또 무얼 바람세.”

 “그냥. 시간 날 때 나 만나러 와주는 거.”

 “그거라면 언제든 그래줌세.”

 “또 나으리 이야기도 해주고.”

 “거거, 연의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나.”

 “700년은 더 들을 수 있어.”

 “벌써 그만큼 세월이 지났나?”

 “. 벌써 꼬리 아홉 개인걸.”

 “차암, 처음에 만났을 땐 겨우 두 개밖에 안되지 않았나.”

 “세월 가는 대로 산 거 뿐이지, .”

 

 말을 편하게 주고받는 이 관계가 참 편하디 편했다. 오랜 친구라 그렇겠지. 이제 내게도 오래 될 친구들이 생겼으니 외로울 일은 없겠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은 지 오래 되어서 그 감각이 무뎌졌지만, 다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난 가보겠네. 커피 잘 마셨네.”

 “, 잘 가고. 백 년 안에는 보자.”

 “그럼세. 잘 있게나.”

 

 그가 가고 나자 나도 내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나를 반겨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아,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 사가야겠다.

 

 “이쁜이들, 보고 싶다!”

 

 

 

# 0.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나와 같이 지내려는 누군가가 없었다. 같은 구미호래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따르려하지 않았고, 인간과 같이 사려니 내가 너무 오래 산다. 이별을 겪기엔 너무 많은 이별을 겪을 거 같기에. 그런 아픔을 갖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구미호는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할까. 오래 산다는 것의 기준은 또 무엇이고.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이 구미호로 될 수 있을까?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구미호의 기를 인간에게 주면 그 인간은 구미호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구미호가 되고 싶다고 할까. 게다가 아직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게다가 그런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인 마냥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긴 세월을 외로이 지내는 것보다 누군가와 부대끼는 짧은 삶이 편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간이 되거나, 누군가 긴 세월을 함께 할 이를 찾거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스르려는 내가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상의 이치가 낮과 밤으로 나뉜다면, 그 이치를 깨끼 위해 살아가는 나는 모순인가.”

 

 구미호는 오래 살기에 인간과 함께 살면 안 된다. 그들의 이치와 우리의 이치는 다르기에 그들은 우리를 그저 요물로 보고 처단하려 든다. 그래서 우리는 숲속에 숨거나 인간으로 둔갑하여 우리의 본 모습을 들키지 않게 살아야 했다. 세상이라는 빛에 우리는 타들어가지 않게 어둠 속에 숨어 살아왔다.

 언제까지 어둠에 있어야 하는가. 언제쯤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을까. 구미호가 인간이 되면? 아니면 인간을 구미호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면?

 

 “하얀 밤...”

 

 그 밤을 보고 싶다. 어두워도 어둡지 않고 낮의 빛으로 같이 물든 그런 밤. 해가지지 않아 세상 만물이 보이는 그런 아름다운 밤.

더 이상 우리들도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

 

 “내 언젠간 그 밤을 보리라.”

 

 그 밤을 보고 그 밤을 곁에 두어 내 한생 끝날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두리라. 그리고 이 생명 끝날 때 쯤, 나는.

 

 

-

 

 

 툭-

 상가 길을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예전이었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생각과 다르게 휘청거린다. 곧 넘어질 거 같다. 하지만 부딪힌 상대가 내 팔을 부드러이 잡아주었다.

 

 “고맙네...”

 “괜찮사옵니까? 소녀가 부딪힌 것이어요. 소녀가 잘못했사옵니다.”

 “나는 괜찮네...”

  

 익숙한 목소리. 나는 상대를 알아보았지만 아마 상대는 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날 알아보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있다.

 

 “소녀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어도 괜찮사와요?”

 “괜찮네. 혼자 갈 수 있네.”

 

 참, 변한 것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하얀 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자신이 하얗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이리도 아름다운 빛을 큰 전모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도 보고 싶었던 하얀 밤조차도 아직도 어둠 속에 있으니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서 가보게나.”

 “. 어르신도 살펴 가시어요.”

 

 상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를 지나쳤다. 나는 나이에 맞겠거니 싶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대로 헤어지면 좋겠건만.

 

 “연어르신!”

 

 누군가 내 옛 이름을 불러 날 세우는 게 아닌가. 날 부른 이는 내가 가르치는 제자 중 한명이었다.

 

 “그건 옛 이름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직접 지은 호로 불러주게.”

 “, 죄송합니다. 흑주(黑晝)어르신. 여쭙고 싶은 게 있어 모습을 보이실 때 급히 불렀습니다.”

 “괜찮네. 무엇을 물으러 왔는가.”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얀 밤이 지나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얀 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도 하얀 밤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얀 밤 또한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나는 집을 나갔다. 하얀 밤이 자신의 정체에 적응이 될 때 쯤, 내가 점점 인간이 되어갈 때 쯤, 내가 사라져도 나대신 모든 것을 잘 짊어지고 갈 수 있으리라 확신이 설 때 쯤 나는 그리 나갔다.

 그리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0년 전 집을 나온 이래 난 내 지혜로 인간들을 가르치며 살아갔다.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그들과 같이 부대끼며. 내가 인간이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부터 나는 내 본 이름에 검은 낮이라 호를 붙였다.

 ‘흑주 백연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밤이 있다면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낮도 있으리라. 대낮에 당당히 거리를 거니는 어둠. 빛을 받아도 그 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그 어둠을 그리 칭하리라.


[#魔女集会で会いましょうby 나쵸] 어느 마녀의 이야기 - 너와의 사계절



 옛날 옛날  어느 숲 깊은 곳에, 늙지도 죽지도 않는 저주에 걸린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녀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연현상부터 그 어떤 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까지, 마녀는 모든 현상과 신비한 힘을 깨우쳐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녀는 자신이 신비한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힘은  누군가의 나이를 나눠줄 수 있는 마법의 힘이었습니다. 마녀가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필요한 희귀초를 많이 얻고 싶었을 때였습니다. 다 자란 희귀초와 희귀초의 씨앗을 두고 마법을 쓰면 다 자란 희귀초는 덜 자란 상태가 되고 씨앗은 새싹이 돋아나 빠른 시간 안에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식으로 마녀는 짧은 시간안에 많은 약초를 얻어 더 많은 것을 알아갔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마법을 더 많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생물에게 마법을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다 자란 식물의 나이를 빼앗아 다른 식물의 나이를 늘려도 보고 늙은 동물은 젊게, 어린 동물은 늙게도 만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이를 늘린 식물은 눈깜짝할 사이에 말라 비틀어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바꾼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빠른시간에 나이를 먹은 동물들은 걷는 법, 사냥하는 법, 나는 법 등을 배우지 못해 생태계에서 살아남지 못해 죽고, 나이가 줄어든 동물들은 결국 다시 나이를 먹고 죽었습니다.

 마녀는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떠한 생명을 자신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게 만들어보기 위해서 자신의 마법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한 생물을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하려면, 다른 생물들은 끊임없이 일찍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녀는 한 생물에게서 뺏은 나이를 자신이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멀쩡할줄만 알았습니다.

 그 마법을 쓰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 살아온지도 오랜 세월, 어느 날 마녀는 또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게 내 손에 닿았던가?'
 평소에 닿지 않던 선반이 손에 닿자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마녀는 자신의 몸이 '성장'하고 있던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나이가 자신을 '성장'시킴을 깨우쳤습니다. 늙지도 죽지도 않은 자신이 '성장'했다는 건 자신도 언젠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나도, 내 힘도 결국 자연의 섭리는 못 거스르나보네..."

 마녀는 그 뒤로 더 이상 마법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다시 마녀 혼자 삽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 겨울

 차갑다. 원래 이리도 차가운 곳이었나. 몇 십년 전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이젠 네가 없으니 내 집이 이리도 차가운 곳인가 싶다. 그래도 나는 나가야 한다. 오늘도 필요한 약초를 캐야하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었다.
 너를 처음만난 곳은 바로 이 현관이었다.

 응애- 응애-
 추운 어느 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처음엔 환청인줄 알았다. 춥기도 춥고 어느 길은 미끄럽기도 해서 이 겨울 날 현관을 열기 싫었는데 고양이도 냐옹거리며 현관문을 벅벅 긁는게 아닌가.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보니 그곳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네가 있었다.
 "뭐야 이거?"
 너를 보기 위해 쭈그려 앉아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너말고도 쪽지도 함께 있었다.
 "음... 잘 안보이네... 노안이 왔나... '아기를 잘 부탁드립니다'...겠지? 아기는 처음 키워본단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쪽지와 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를 어쩐다 싶었다. 여기서 마을까지는 굉장히 멀기도 했고, 이 추운 날 딱히 마을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추운데 여기 둘 수도 없고."
 그렇게 나는 어린 너를 안아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나와 너의 첫 만남이었다.


# 봄

 현관을 나와 내가 자주 약초를 캐는 들로 나왔다. 이곳은 여러 약초가 있지만 여러 식물도 많았다. 그 중에는 키 큰 식물들이 무더기로 자란 곳도 있는 데 나는 그곳을 기피한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하면 그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녀님은 왜 키가 안 커요?"
 말도 못하던 아기가 십년도 안 됐는데 벌써 나만큼이나 키가 커졌다.
 "그건 불로불사라서 그래."
 "그게 뭐에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나는 키가 작다. 그건 이 어린 모습으로 죽지않고 살아가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럼 나이를 안 먹어요?"
 "...아니, 먹을 수는 있어."
 "어떻게요?"
 "다른 것의 나이를 가져오면."
 "나이를 가져와요? 어떻게요?"
 "내 힘을 사용하면 가능하지."
 "그럼 가져오면 되지 않아요?"
 너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힘을 안 쓰는 이유를 이해하기에는 이 아이가 아직도 어렸기에. 그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난 이대로가 좋으니 너나 많이 먹으렴."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너는 입을 삐죽 내민다. 그것 조차도 성장하는 널 보는 즐거움인가 생각하련다.


# 여름

 약초를 캐는 곳 옆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너는 그곳을 유독 좋아했는데, 이곳에 온 김에 한 번 가보도록 할까. 내가 그곳에 가면 너는 꽃을 따는 뒷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줄것만 같았다.

 "나도 너처럼 커지고 싶게, 왜 그렇게 커진거야?"
 인간은 참 신기하다. 고작 20년 밖에 안 지났는데 나보다 한참 작았던 아기가 저렇게 커지다니.
 "불로불사잖아요~"
 내게 웃으며 말하는 너는 내게 꽃다발을 내민다.
 "오늘 꽃이요."
 나는 뾰루퉁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네가 건내는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아-, 향기 좋다.
 "거기서 꺾어온거야?"
 "네, 여름이라 그런지 꽃이 많이 피었더라고요."
 나는 꽃을 화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곤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꺾어 온 것만으로 이미 죽었을텐데, 물에 담그면 다시 살아나는 건 참 신기한거 같아."
 "그런가요?"
 "응, 나는 죽었다 살아나게 하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거든."
 "그럼 나이를 나눠주는 마법은 어때요?"
 "...그건 안 쓸거야."
 "그래요?"
 "응,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거든."
 화병에 담긴 꽃을 톡톡 건드려본다. 생기를 머금은 꽃이 시들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이번엔 너에게 다가가 톡톡 건드려본다. 내 키에 맞춰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싱긋 웃는 모습으로 내게 짧게 묻는다.
 "왜요?"
 "아니 그냥."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나의 말을 받아 듣는 너.
 "다음에 꽃 꺾으러 갈 땐 같이 가자고."
 "네, 그러도록 해요~"
 그 어려운 것을 이해할만큼 훌쩍 커버린 네가 참 대견스럽다.


# 가을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이름모를 들꽃이라도 몇몇개의 꽃은 이름을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코스모스이다. 보라색 자주색  분홍색 하얀색의 코스모스 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는.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너를 보고는 너의 손을 잡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쓴다면...
 "마법은 안돼요..."
 너는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힘겹게 입을 연다.
 "...하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저에게 예전에 그 말을 하셨던거 기억나요?"
 너의 말에 작게 끄덕였다. 난 나의 마법을 스스로 안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주었고, 너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그 나이에서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키셔야 돼요. 당신의 선택에 예외를 두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저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렵니다... 부디 당신이 제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나날이 힘이 없어지는 너를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야 있었다. 너를 위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 나의 최선은 네가 내 곁에서 더 머물 수 있게 약을 지어주는 것뿐,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네가 힘겹게 잡은 내 손 위로 힘없이 손이 풀리던 날, 나는 너를 위해 해준 것이 없어 그저 그 손을 꼭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요."
 내게 마지막까지 웃으며 말해주던 그 한마디가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해 눈을 감았다.


# 또 다시 겨울

 꽃길을 따라 그 끝으로 가면 그 어떤 꽃들도 없는 곳에 닿는다. 꽃이 없는 그 가운데에 오똑이 서있는 하나의 비석. 나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이곳만이 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역시 너랑 살지 말걸 그랬다... 나한테는 너무 짧은 시간이야,  너랑 보낸 시간들은..."
 이곳만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내뱉으며 너를 향해 울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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